미리내 성지
박해시대 교우촌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무명 순교자들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
- 103위 시성 기념 천주 성삼 성당 -
* 행정 구역으로 미산리로 불리는 이곳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이다. 박해시대의 교우촌이었던 이곳은 병오박해로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1866년 순교한 성 이윤일 요한의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면서 순교 사적지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두 성인의 시신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지만, 1907년에 건립된 석조 성당과 1928년에 건립된 김대건 신부의 경당, 1991년에 건립된 천주 성삼 성당이 있고,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술라, 김대건 신부의 이장에 참여한 이민식 빈첸시오, 그리고 무명 순교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 이곳이 순교 사적지로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옮겨져 안장되면서부터였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우체국 뒤편의 와서(일명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요한, 이민식 등에 의해 발굴되어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 그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886년에 시복 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 1901년 5월 21일에는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교정으로 옮겼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뒤인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으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문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또 신학교의 유해 중 정강이뼈는 1983년 시성 운동이 전개될 때 교황청으로 조사차 가져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리내에 하악골 유해와 함께 보관되어 오고 있다.
*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다.
* 미리내에는 1853년 2월 3일 사망한 페레올 주교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이는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주교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 79위 시복 기념 경당 내부 -
- 79위 시복 기념 경당 -
<미리내 성지 순례 안내>
* 미사 시간: 월~토요일: 오전 11시 30분
주일: 오전 11시, 오후 2시
성시간: 목요일 오후 10시 30분~ 오전 1시 30분
* 고해 성사: 매일 미사 30분 전부터
* 기타 사항:
- 식당: 1,500명 식사 가능
* 20명 이상 경우, 순례 4일전까지 성지 사무실로 예약
- 피정: 80-90명 정도 이용 가능- 순례자의 집
* 교통편: 대중교통 이용
안성 버스터미널에서 미리내행 버스 이용(버스 시간 안내: 백성 운수/031-673-3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