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산성지
신유박해 이후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묘소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수리산성지
수리산은 박해시대의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으로, 1838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일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곳이다. 이곳은 당시 신자들은 담배를 재배로 생계를 유지하여 '담배촌'이라고도 부른다. 최경환은 회장으로서 교우들과 함께 담배 농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당시 이곳에는 60여 명의 신자들이 살았다고 한다.
수리산 교우촌의 옛 모습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7월 31일 최경환 일가와 이 에메렌시아 등 40여 명의 신자가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7월(음력) 하느님의 종 이 에메렌시아, 9월 12일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이듬해 1월 31일 복자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하였다.
수리산성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묘소
최경환의 시신은 그의 둘째 아들 최의정 야고보 등이 수습하여 노고산 근처에 가매장하였다가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1930년 5월 26일 명동성당을 거쳐 1967년에 절두산 성당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현재 수리산에 있는 최경환의 묘소에는 수원 레지오 마리애 꼬미시움에서 세운 십자 비석이 있으며, 묘소로 가는 길에는 1987년 봄에 신자들이 세운 십자가의 길이 있다. 같은 해 여름에는 성모 동굴이 마련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는데, 당시 박해와 기근으로 인한 굶주림에 지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매장할 겨를이 없어 대부분의 시체가 유기되었다.
그때,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마을에 있던 최경환 성인은 신자들에게 의연금을 거두고, 함께 서울로 올라가 순교자들의 시체를 찾아 매장하고, 가엾은 교우들을 돕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교우촌 신자들도 순교를 준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날마다 사람들을 불러 열성적으로 격려하며 순교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윽고 서울에서 포졸들이 찾아오자,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며 식사를 마련해 주며 쉬어 가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 자와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다."라며 감탄하였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40여명의 신자가 오랏줄도 없이 길을 떠났다. 이 기이한 행진에 구경꾼들은 악담을 퍼붓거나 혀를 차며 불쌍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선두에 있던 최경환 성인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신 것을 생각합시다."하며 격려하였다.
수리산성지 성당에 안치된 최경환 성인의 팔 유해 현장조사단과 순례자의 미사 봉헌
40일 이상 참혹한 고문을 이겨낸 최경환에게 고문관들은 '바윗덩어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이 죽을 시간을 미리 예언하였고, 영광스럽게 순교하였다.
* 성지순례 및 미사 등의 안내는 수리산성지 홈페이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