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덕산 관아터

덕산 관아터
(현 덕산초등학교)

 

성 손자선 토마스와 복자 정산필 베드로의 신앙 증거지

 


덕산 관아가 있던 자리에는 덕산초등학교가 세워졌다.
담 넘어 보이는 약국 부근이 옛 감옥터이다.

 

 

■ 1866년 병인박해 때 성 손자선 토마스가 신앙을 증거한 곳.
다블뤼 주교가 거더리에서 체포된 지 4~5일 후, 덕산의 포졸들이 거더리 마을의 몇몇 신자 집을 약탈하였는데, 얼마 뒤 덕산 관아에서 '약탈당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손자선은 혼자 물건들을 찾으러 갔다가, 천주교 신자인지를 묻는 관리의 물음에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배교를 거부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관아에서 오물을 뒤집어 쓰는 모욕을 당한 후 해미로 이송되어 다리가 부러질 만큼 혹형을 받고, 공주 감영으로 다시 이송된 후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복자 정산필 베드로가 참수형을 받은 곳.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형장으로 나가 참수형을 받은 복자 정산필 베드로는,  덕산 출신으로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직접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내포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사명을 다한 그는,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시보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과 절친한 사이였다. 이들 모두 1797년의 정사박해로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정산필 베드로는 1799년 사형이 집행되던 날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오."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중 정산필 베드로와 관한 기록

 


<사학징의> 중 정산필 베드로와 관한 기록

 

 

"김여삼은 포도청에서 회송해 온 관문을 보니,
그 형인 김여백, 김여중과 함께 이미 포도청에서 신문하여 처리했다고 하며,
정산필은 본 충청도에서 이미 매맞아 죽었으므로 이에 다시 신문할 것이 없다."

(<사학징의>에는 정산필이 매를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