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골성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탄생지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
다락골성지 무명 순교자들의 묘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소재지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탄생지인 '다락골'은 마을의 형태가 다락 모양 같다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나, 이것이 점차 '달안골'로 바뀌어진 듯 하다. 다래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다래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직후로 추정된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증조부인 최한일이,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고, 사망 후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아내 경주 이씨가 외아들 최인주(최양업 신부의 조부)를 데리고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청양 지역은 이보다 더 전에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다.
최양업 신부의 생가터
다락골에 정착한 최인주는, 장성한 이후 약 700m 떨어진 골짜기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에 신자들이 모이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 명명되었다. 최양업 신부와 부친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태어나 1830년대 초에 경기도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 4동 담배골)으로 이주하였다.
줄무덤으로 향하는 길목의 무명 순교자상
십자가의 길 언덕
다락골 신자들은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많은 이가 체포되었다.
다락골 뒷산에는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줄무덤이 있다. 약 30여 기의 무명 순교자의 무덤이 있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박해가 두려워 천주교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것을 숨기다가, 관아에서 이 사실을 알게되어 마을을 불살라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실제 다락골 순교자들의 무덤인지 해미나 갈매못(보령)의 순교자들의 무덤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다락골성지는, 성역화 사업을 담당했던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가 사료를 수집 및 현지 답사를 통해 1981년 줄무덤이 총 세 군데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후 편의상 '제1·2·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줄무덤은 14기(오기선 신부의 증언에는 17기)의 무덤이 있으며, 세 단계로 모셔져 있다. 최씨 가문 중 비신자였던 이들이 이곳을 임자없는 무덤이라고 이장하여 안타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다.
제2줄무덤은 10기의 무덤이 있으며, 제1줄무덤 서남쪽 밑으로 2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어, 제3줄무덤은 13기의 무덤이 있고, 제1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이곳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된다.
그러나, 무덤마다 몇 구의 유해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개발 당시에도 이미 100년이 넘은 데다가,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달리 봉분이 큰 것으로 미루어볼 때 한 무덤 안에 여러 명의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전교구는 1982년 무명 순교자들을 위한 묘비를 세웠다.
다락골성지 전경
* 성지순례 및 미사 등의 안내는 다락골성지 홈페이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