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 성지
기해박해 순교 세 성인 성직자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곳
- 삼성산 성지 세 성인 묘소 -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곳이다.
'삼성산'이라는 명칭은 신라 때의 명승 원효, 의상, 윤필 등 3명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는데,
1901년에 위의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1836년 이래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
그리고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8월 10일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9월 6일에 각각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후
1839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삼성산에 안장되었던 성 샤스탕, 성 모방, 성 앵베르
순교 후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는데,
신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찾아오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하였고, 그 중 몇 명은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박 바오로와 몇몇의 신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하였다.
4년 뒤인 1843년, 이들의 유해는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과천 땅이던 관악산의 한 줄기인 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삼성산이다.
신자들은 훗날을 위해 이장 연도와 3명의 이름을 위치대로 새긴 비문을 광중과 관에 적어 넣었다.
박 바오로는 이장 경로와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장소를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으며,
박순집은 훗날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자 이 사실들을 교구에 보고하였다.
그 결과 1886년 경 시복 판사를 맡았던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했고,
1901년 10월 21일에는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박순집의 지시에 따라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졌다.
성 샤스탕, 성 모방, 성 앵베르는 1857년에 모두 가경자로 선포된 데 이어
1925년에는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순교 기념비
1970년 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 신부의 회고를 토대로 삼성산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12일 그 자리에 '삼성산 순교 성지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서울대교구에서는 이 일대의 임야 약 16,000평을 확보한 뒤 1981년 3명의 성인 이름이 새겨진 순교비를 추가로 건립하였는데,
1992년에 '삼성산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이 본당에서 사적지를 관리하고 있다.
* " ... 나는 날마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납니다.
3시에는 집안 사람들을 불러 기도를 드리고 3시 반에는 예비자가 있는 경우에는 성세를 주고, 혹은 견진을 주는 것으로 성무의 집행이 시작됩니다.
... 그리고는 해가 뜨기 전에 다른 집으로 옮겨갑니다.
나는 시장기 때문에 고통을 많이 당합니다.
왜냐하면 2시 반에 일어난 다음 정오까지 기다려서야 영양가치가 별로 없는 맛 없고 양도 많지 않은 식사를 하는데,
춥고 건조한 기후인지라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을 보내고 있으니 내게 큰 위안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매일 드려지는 미사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미사를 드리고,
이렇게 해서 연옥 영혼들에게 그들이 그날 받은 은혜와 서늘함의 소식을 전하여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9년 3월 30일자 서한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