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좌명동대성당
한국 교회 공동체가 탄생한 곳이자
천주교 신앙이 퍼져 나간 중심지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 명동 성당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1882년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된 이래로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 역할을 해 왔고, 한국 사회안에서는 천주교회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 명례방 집회 -
* 1784년 2월 무렵 이승훈은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북경에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해 가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교리를 배운 주변 동료들에게 대세를 주면서 신앙공동체가 시작되었다.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요한 세례자)의 집에서 첫 번째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그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신앙 모임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로 남산골 명례방 장악원 앞에 위치한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신앙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로써 명례방 신앙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 명동주교좌대성당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서는 신앙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던 명례방에 속한 곳으로 1839년 9월 9일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래, 1882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되어 조선대목구 주교좌 성당으로 "종현 본당" 또는 "명동 본당"으로 불리었다.
1911년 4월 8일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나뉘면서 서울대목구 주교좌 성당으로,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회 교계제도의 설정과 함께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블랑(Blanc, 白圭三)주교는 종현의 땅을 부분적으로 매입하기 시작하고 인현서당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추진하면서 성당 건립을 시도하였다. 그러던 중 성당의 위치 문제로 인해 정부 당국과의 분쟁이 일어나 성당 건립은 지연되었지만 신자 수는 계속 증가하여 1892년 약현(現 중림동)본당을 분리시켰다.약현 본당의 분리와 함게 코스트 신부가 성당 설계에 착수하였고, 공사를 지휘하다가 1896년 선종했다. 그후 후임으로 부임한 프와넬 신부가 본당 사목을 맡아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지었다. 1898년 5월 29일 축성식과 함께 한국 교회의 주보인 무염시태의 마리아께 성당을 봉헌했다.
- 다섯 분의 순교 성인과 네 분의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는 지하성당 -
* 지하성당에는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 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되었다. 순교한지 약 20일 후 7~8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학교가 있는 노고산에 4년간 매장되었다. 그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 현재 대성당 지하묘역에 모셔져 있는 성인과 순교자의 유해는 기해박해 당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 성 샤스탕 신부, 성 모방 신부의 유해 일부와 성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다섯 분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병인박해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루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의 유해와 두 분의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성당 중앙 제대의 좌측 회랑 제대 위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상-
- 주문모 신부와 초대 명도회장 정약종과 신자들의 모습을 담은 주교좌명동대성당의 중앙문 -
- 성모 동산 -
- 지하 소성당 입구에 세워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 예수 사형선고 받으심(1994년, 장동호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