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통영 관아와 옥터

 

순교 복자들의 신앙 증거지

 

 

통영 관아와 옥터

 

 

 

- 국보 305호로 지정된 통제영의 객사 세병관((洗兵館) -

 

 

 

순교 복자들과 통영  

 

* 경남 통영시 문화동 62번지에 위치한 통제영은 통영 관아가 있던 곳으로,  1866년 12월(음력) 하느님의 종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와 1888년 하느님의 종 윤봉문 요셉이 혹독한 문초와 형벌 속에 신앙을 지켰던 곳이다.

 

* 제주도 함덕리(현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 출신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1816~1867)는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사람으로 1857년 2월 동료들과 함께 무역차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1개월 이상을 표류한 끝에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었다. 그의 동료들은 죽은 상태였고, 그는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져 그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났다.  김기량은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워 그해 5월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 그는 1858년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데 열중하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 박해가 일어난 직후 경상도 통영으로 사업차 나갔던 그는 그곳의 게섬(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져 체포되어 통영 관아로 끌려가 심한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다.

 

* 혹독한 매질에도 변함없는 김기량의 신앙에 통영 관장은 대구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그를 때려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 다시 심하게 매질을 당했지만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을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1866년 12월(음력), 그의 나이 51세였다.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 1888년에는 윤봉문 요셉이 진주로 이송되어 순교하기 전에 이곳 통제영에서 배교를 강요 당하며 문초와 형벌을 받은 신앙 증거의 장소이다. 그는 진주로 갈때 발뒤꿈치를 칡넝쿨로 꿰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끌려갔다. 진주에서도 여러번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에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 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윤봉문 요셉에 대한 순교 기록

 

* "윤(봉문) 요셉, 본디 양산 사람으로 거제에 와 살더니, 무자년(1888) 군난에 통영 포교에게 잡혀 중영에 갇혔다가 진주 진영으로 이수를 왔더니, 영장 구연팔이 잡아들여 물어 가로되,

'네가 무엇을 하느뇨?'

답 왈 '천주교를 하노라.'

영장이 또 문 왈 '네가 천주교를 알면 일러 보라'하거늘 천주 십계를 이르니,

영장이 또 문 왈 '네가 천주교를 누구에게 배웠느뇨?'

요셉이 답 왈 '양대인(서양 선교사)에게 배웠노라.'

영장이 또 문 왈 '네가 그러면 진서(한문)으로 배웠느냐? 언문으로 배웠느냐?' 하거늘

요셉이 답 왈 '언문으로 배웠노라'하니,

영장이 왈 '언문으로 배웠으면 가짜를 배웠구나'하고 또 가로되 '너는 위 관에서 도적으로 죽이라는 분부가 있는 고로 내가 죽이겠노라'하니,

요셉이 답 왈 '지금 천주교 하는 사람을  죽일진대, 영문으로 초보하여 회보 후에 죽여 주소' 하니,

영장이 왈 ' 네 말이 쓸데없다 ' 하고 오문(남문)으로 보내 가둔 후에 모든 하인에게 분부하여 가로되,

' 이 일을 누설치 말라' 하고 옥중에서 가만히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7세요, 무자 2월 20일(양력 4월 1일)이더라. 증인 동진규 외인 진영 장교라. 지금 살아 있고, 이 사정은 진주 비라실 장 도밍고가 동진규에게 친히 들었느니라."

- <병인치명사적> 권, 18, 42~43쪽 -

 

 

통제영(統制營)

 

* 통영은 통제영의 약칭이다. 통제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경상, 전라, 충청 3동의 수군을 지휘 통할하던 본영을 이른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전연패하던 육군과 달리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연전연승하여 왜군의 소위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킴으로써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나라를 구한다. 이에 선조는 이듬해에 당시 직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에게 내리고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수군을 통할하게 한다.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다 새로이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으니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안 후에도 거제도 오아포, 고성현 춘원포 등지로 옮겨 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선조 37년(1604) 9월 9일 윤허를 받은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두룡포에 통제영을 이설하면서부터 통영의 역사가 열리게 된다.

 

 

 

 

 

 

 

 

 

-통제영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면 통영 옥터가 있던 곳에 이르게 된다-

 

 

 

 

 

 

 

 

 

 

 

 

 

 

 

- 윤봉문 요셉이 통영에서 발뒤꿈치를 칡넝쿨로 꿰어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끌려온 진주 옥터.

당시 옥이 있던 곳에는 대안동 중앙 시장이 생겼다. 시장의 어물전 주변에는 감옥의 우물 자리가 남아 있다.

 

 

 

 <통영 관아와 옥터>

 

 

* 문의: 마산교구 태평동 성당(경남 통영시 태평동 369-1/ 전화 055-645-3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