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 성지
"저는 풀려나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

- 신석복 순교복자가 안장된 진영성당 공원 묘지 -
복자 신석복 마르코(1882~1866)
경상도 밀양의 명례 출신으로 장사를 하던 신석복 마르코(1828~1866)는 1866년 병인박해때 장사를 나갔다 돌아오던 길에 동료와 함께 대구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즉시 밀양으로 압송되던 그는 하루동안에 무수한 형벌을 받고 다시 대구로 끌려갔다. 그의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알고 돈을 마련해 가지고 그 일행을 뒤좇아 가 포졸들을 매수하고 이 사실을 신석복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포졸들에게 한 푼도 주지 말라'고 당부하여 대구까지 가는 동안 더욱 심하게 능욕을 당했다. 대구에서도 여러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뼈가 부러질 정도였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며 며칠을 옥에 갇혀 있다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1866년 3월 31일, 그의 나이 38세였다.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훗날의 증언에 따르면, 신석복의 순교후 아들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그 시신을 모셔왔다. 그러나 명례에는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모시지 못하였고, 부득히 낙동간 건너 한림정 뒷산의 노루목(현 경남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후 순교자의 유해는 1975년 12월 1일 진영 성당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 십자가 옆의 오른 편에 위치한 순교자 묘소 -
* <복자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 묘소>
- 복자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생가터와 명례성지-

천주교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인 명례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이다.
명례 공소는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가 출생한 곳이며, 신석복의 순교를 가능케 한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다. 또한 영남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본당이 설립(1897년)된 곳이며, 명례의 첫 본당 주임이었던 강성삼 신부(1866~1903)가 사목하다가 돌아가신 곳이다. 강성삼 신부는 김대건, 최양업에 이어 세 번째 방인 사제로 한국 땅에서는 처음 서품된 사제이다(1896년 서품). 마지막으로 현재 남아 있는 성전 건물의 문화사적 가치로, 이 건물은 첫 성전(1928년)을 축소 복원한 것(1938년)으로 남녀 석이 구분되어 있는 성전 내부와 벽 쪽을 향한 제대와 그 위에 모신 십자가와 장미의 성모님에게서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자료 출처: <신앙의 고향을 찾아서, 천주교 마산교구 '명례성지'>,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