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 순교 성지와 진무영
세 분 순교자와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 베드로 묘소
*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초기부터 천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할머니 송씨와 며느리 신씨에게 각각 마리아로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왕족이었던 이들이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하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그동안 자식 상계군의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양하여 살고 있던 은언군(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천주교 강화성당 부근)에서 처형되었다.
* 1871년에는 강화도 해역에 미국 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널 셔먼호가 방화된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게 되면서 군사적 충돌이 빚어졌다(신미양요).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그 결과 기록상 제물진두(현재 화수동 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등 세 분이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지는 순교자 3위비를 만들어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 또한 이곳에는 평생 동안 아버지 박 바오로 처럼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순교자들의 삶을 정리하며 사셨던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모신 묘소가 있다.
갑곶 순교 성지 순례
- 갑곶 순교 성지 -
- 순교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3위비 -
-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 베드로 묘소 -
박순집 베드로(1830-1911)
* 서울 남문 밖의 전생서(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의 신앙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부친 박 바오로는 성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뒤 몇몇 신자들과 함께 그 시신을 찾아다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하였으며, 1843년에는 다시 그 유해를 발굴하여 박씨 선산인 삼성산(서울 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에게 전함으로써, 박해 후 삼성산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고 1901년 10월 21일 순교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 데 기여하였다.
* 또한 박 바오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 미리내로 이장되기에 앞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시신을 찾아내 와서(현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왜고개)에 안장하였었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는 김대건 신부를 본 적이 있었다.
* 박순집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프티니콜라 신부와 우세영 알렉시오 등이 3월 7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군인으로서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박순지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일에 시신을 찾아내 새남터 부근에 임시로 묻었다가 4월 14일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우포도청등록>에 있는 박순지의 문초 기록에는 이장에 참여한 사람들 중 박순집이란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박순집은 3월 7일과 9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참아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7일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 박해 후 박순집은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 작업이 시작되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교회 법정에서 진술하였고,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던 곳과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 등을 증언하였다. 그가 진술한 이 내용들은 시복 재판의 기록 서기를 맡았던 로베르 신부가 필사하여 남긴 <박순집 증언록> 3책에 수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증언록에는 모두 153명의 순교자가 수록되어 있는데, 1책 앞 부분에 있는 '장(베르뇌) 주교 일기'와 '백(브르트니에르) 신부 일기'를 제외하고는 순교자 개인 중심으로 각자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 당시 박순집은 서울 홍제동에 살고 있었는데,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을 이 수녀회에 입회하도록 하였다. 그가 곧 최초의 한국인 수녀 가운데 한 사람인 박황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다. 이 무렵 그는 홍제동 자신의 집을 공소 집으로 내놓았다. 그러다 1890년 제물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전교에 힘썼으며, 말년에는 숙골(현 인천시 도화동)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자료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2006-
- 갑곶 성지 십자가의 길, 묵주 기도의 길 동산 -
- 십자가의 길 제11처 -
- 묵주 기도 길 -
- 성지 십자가와 순교자 3위비 -
- 갑곶 쉼터 입구 십자가 -
- 왼쪽 성지 관내의 통제영학당(근대식 해군사관학교) 터 표지석 -
진무영
* 진무영은 조선시대 1700년(숙종26)에 해상 방어를 위해 설치된 군영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1868년 5월 22일 최인서 요한(애오개 회장), 장치선(장주기 요셉 성인의 조카), 박서방, 조서방 등이 순교한 곳이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로 성직자 12명 가운데 9명과 신자 1만 여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분인 리델 신부를 배로 중국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가 신교의 자유, 남은 교우들의 구출, 복음 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진무영이 있던 곳은 강화성당 부근으로 인천교구 강화성당 경내에는 이를 기리는 장소가 조성되어 있다.
- 인천교구 강화성당 경내에 조성된 진무영 순교 성지 -
- 인천교구 강화성당 -
<갑곶 순교 성지 순례 안내>
* 미사 시간: 매일 오전 11시(화요일 휴무)
* 고해 성사: 매 미사 30분전
* 주차 시설: 있음
* 교통편: 대중교통 이용
- 서울 신촌이나 김포공항, 일산, 인천터미널, 부평 등지를 오가는 강화 버스를 이용하여, 강화대교(초지대교가 아님)를 건너서자마자 강화군 청소년수련관 앞에서 하차, 길을 건너 강화역사관 방면으로 도보 10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