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곡성 정해박해 진원지

 

   곡성 정해박해 진원지

 

 

- 덕실 마을 승법리 가마터 -

 

 

 

 

정해박해

 

* 1827년(순조27) 전라남도 곡성에서 시작되어 전라도 지역 전역, 경상도 상주, 충청도와 서울 일부 지역에서 약 3개월 동안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 1815년의 을해박해와 마찬가지로 이미 법령화되어 있던 박해령과 지방관들의 중앙 정부에 대한 과잉 충성이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 정해박해는 신자들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27년 2월 전남 곡성군 덕실현(현 전남 곡성군 오곡면 승법리) 마을의 옹기점에 전 아무개라는 신입 교우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주막을 차려 놓았다. 한편 이 마을에는 한덕운 토마스라는 유명한 순교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한백겸은 성질이 포악하고 행실이 좋지 못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백겸이 이 주막에서 술을 과하게 마시고 전씨의 부인에게 심한 욕설과 손찌검을 하자 남편 전씨가 홧김에 천주교 서적을 들고 곡성 현감을 찾아가 일부 천주교인들을 고발하였다. 곡성 현감은 즉시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약 240여 명이었다.

 

* 신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다른 도에 거주하는 신자들의 이름이 밝혀짐에 따라 그 박해 규모가 확대되었다.  5월 17일(음력 4월22일) 상주에서 신태보 베드로가 검거되어 전주로 압송되고, 같은 고을 앵무당에 있던 교우촌이 밀고당하면서 경상도 지역에서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도 이경언 바오로가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 단양에서 역시 경상도의 박해를 피해 숨어 있던 신자들이 붙잡혀 충주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서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서 2월부터 4월까지 체포된 신자들은 약 500명으로 전라도에 수감된 신태보 베드로, 김대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 이일언 욥 등 9명, 경상도에 수감된 박보록 바오로, 김사건 안드레아, 안군심 리카르도, 김세박 암브로시오 등 6명, 충청도에 수감된 유성태 라우렌시도 등 총 16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 이들 가운데 정해박해 때 순교한 이경언, 박보록, 김세박, 안군심, 이성지, 이성삼 등 8명은 모두 옥사하였으며, 나머지 8명은 기해박해(1839) 때까지 수감되었다가 박해가 시작된 후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다른 박해에 비하여 정해박해에 이처럼 배교자가 많았던 것은 당시 전라 감사 김광문이 독특한 방법으로 체포된 신자들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가능한 한 사형을 피하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대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도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처벌을 그쳤다. 또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형 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해서도 직접 칼을 들이대고 죽이기 보다는 신자들을 무한정 옥에 수감하여 굶주림과 고통으로 죽게 하였다.

 

* 정해박해는 본래 천주교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기보다 천주교의 전교 수단인 서적과 성물을 근원적으로 막고자 하는데 그 일차적인 목표가 있었다.

 

* 현재 교황청 시성성에 시복 청원되어 심사 중에 있는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전라지역에서 6위, 경상지역에서 6위가 정해박해와 관련하여 순교하였다.

 

- 전라지역(전주에서 옥사 혹은 참수): 이경언 바오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

 

-경상지역(대구에서 옥사 혹은 참수): 박경화(보록) 바오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형조에서 아뢰기를 .....  '이경언(바오로), 김대권(베드로), 이유정(요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신태보(베드로), 정태봉(바오로) 등 일곱 죄인들은 손과 발이 다 드러나고 정상의 자취가 의심할 바 없으니, 감사에게 명하여 격식을 갖추어 결안을 받고 아뢰어 처리토록 하고, ...... 청컨대 장계에서 청한 것에 따라 시행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십시오'라고 하니, 허락하였다."

- 『일성록』, 순조 27년, 윤5월 2일 -

 

 

 

 

 

 

 

 

 

 

 

 

 

 

 

 

- 승법리 옹기 가마터. 지금도 이곳에는 옹기 조각들이 산재해 있다-

 

 

 

 

 

 

 

 

 

 

 

 

 

 

- 곡성 덕실 마을 승법리 옹기 가마터에 세워진 표지석 -

 

 

 

- 덕실 마을 승법리 가마터에서 바라다본 미산리 -

 

 

 * 1815년 을해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숨어들어온 신자들은 곡성 지방 덕실 마을 승법리와 미륵골(미산리)에 정착하면서 생계유지와 신앙생활을 위해 가마를 열고 옹기를 구워팔며 살았다.

 

 

 

<곡성 정해박해 진원지: 승법리 가마터 순례 안내>

 

 

* 연락처: (061)362-1004(곡성 성당)

 

* 교통편: 곡성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6 Km 지나 당고개 언덕을 넘어서 좌측에  "덕실 마을 가마터 300m"라고 쓰여진 이정표 - "정해박해 진원지" 표지석

 

* 곡성 성당에 연락하여 안내 받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