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구산 성지

 

 

구산 성지

 

 

 

구산에서 태어나 신앙을 증거하고 고향 땅에 묻힌 순교자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

 

 

- 성 김성우 안토니오 묘역과 현양비 -

 

 

 

 * 박해 시대 이래로 유명한 교우촌이자 순교 성지인 구산은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분인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이며, 그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구산(龜山)이라는 지명은 마을 북쪽 한강 변에 세워진 작은 산이 거북이 등같이 생긴데서 유래한다. 이곳에 최초로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0년대 이전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한 것은 1836년 1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P. Maubant)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이 고을의 김성우 안토니오를 회장으로 임명하고 공소를 설립하면서부터이다.

 

* 구산에서 배출된 순교자는 1841년 4월 29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성 김성우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그의 둘째 동생 만집 아우구스티노, 셋째 동생 문집과 김성우의 아들 성희, 만집의 아들 차희, 문집의 아들 경희, 사촌인 주집의 아들 윤희와 최지현, 심칠여 등 모두 9명이다.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

 

 

* 이름은 우집이고, '성우' 또는 '치윤'은 그의 자이다.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김영춘과 청주 한씨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면서도 인심 좋기로 유명하였는데,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가 셋째인 문집과 같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830년 경이었다. 이때 둘째인 만집 아우구스티노는 입교를 망설였지만, 이내 신앙을 받아들여 3형제가 함께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친척과 이웃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구산 마을이 교우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 3년 후 1833년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김성우는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현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현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이후에는 한여름 동안 모방 신부를 이곳에 거처하도록 했다.

 

 

*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된 3월 21일(음력 2월 7일), 포졸들이 구산으로 들이닥쳐 그와 동생 하나를 체포하였다. 이때 그들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으나, 그 해 말 배교자의 밀고로 동생들과 사촌 김주집이 체포되어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둘째인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뒤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2월 19일(음력 1월 28일) 옥중에서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하고 말았다. 반면에 셋째인 문집과 사촌인 주집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

 

* 당시 김성우는 미리 포졸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지방으로 피신하였다가 끝내 포졸들의 수색망에 걸려 1840년 1월경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그중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또 온갖 형벌을 받아내면서 석방될 희망을 전혀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생애를 다하려고 다짐하였다.

 

* 그러다가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대를 맞고도 배교하지 않자 관장은 다음날인 4월 29일(음력 윤 3월 9일) 그에게 교수형을 내렸다. 그의 나이 47세에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할 따름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한 뒤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 암브로시오 등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다.  

 

* 성인의 굳은 신앙심은 1925년 7월 25일 로마 교황청의 시복 조사를 거쳐 '한국 79위 복자' 위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가정과 온 인류의 평화를 기리시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

 

 

- 성인과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으로 들어서는 안당문 -

 

 

- 성인 묘역과 성지 성당-

 

 

 

 

-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이곳 구산의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였고, 1836년 이후에는 한여름 동안 모방 신부를 이곳에 거처하도록 하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Maubant, Pierre Philibert, 1803~1839)

 

*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서양인 신부로 한국명은 나백다록. 그는 1829년 사제 서품 후 동양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서한을 읽고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포교지로 가는 도중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주교의 용기에 감동을 받아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1835년 11월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마가자로 가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장사지냈다. 당시 모방 신부는 이미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으므로, 즉시 마가자를 떠나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 1836년 1월 13일 조선 국경에 이른 모방 신부는 조선의 밀사 조신철 등을 만나 압록강을 건너 의주 성문을 비밀리에 통과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 머무르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1836년 12월까지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면서 성무활동을 하였고, 신학생을 선발하여 1836년 12월 3일 선발된 세 신학생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김대건 안드레아로부터 순명 서약을 받고 그 날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 일행에 신학생들을 포함시켜 중국으로 보냈다. 1837년 1월과 12월에 입국한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와 함께 한국 교회는 3명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커다란 발전을 보게 되었다.

 

*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1839년의 기해박해로 그해 9월 21일 성 마태오 축일에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다. 세 선교사는 1984년 5월 6일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 구산 순교자 십자가탑: 성지 경내에 세워진 10개의 순교자 십자탑은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이곳 출신   8분의 순교자를 상징하고 나머지 하나의 십자가 탑은 오늘 이곳을 순례하는 순례자인 '나'의 십자가탑이다.

 

 

- 성 김성우 안토니오 동상 -

 

 

- 십자가의 길 - 

 

 

- 묵주기도의 길 -

 

 

- '구산'이라는 지명의 유래와 걸맞게 거북이 등의 형상으로 세워진 구산 성지 정문 -

 

 

 

 

 

 

 

 

 

 

 

 

 

 

 

 

 

 

 

 

 

 

 

 

<구산 성지 순례 안내>

 

 

* 성지 미사 안래

- 화요일 ~ 주일: 오전 11시

- 매주 화요일: 순교자 현양미사

- 매주 수요일: 성가정 미사 

- 매주 목요일: 위령미사(10시 30분 연도)

- 매주 금요일: 예수 성심 미사

- 매주 토요일: 성모 신심 미사

 

* 고해 성사: 미사 시작 30분전부터

 

* 주차장: 대형 주차장 있음

 

* 교통편: 대중교통 이용시

- 지하철 5호선 상일동역 하차 - 3번 출구 - 50m 전방 보성사우나 앞에서 셔틀버스 운행

- 셔틀버스 운행 안내:

 1) 상일동 역에서 성지: 오전 9시 30분, 10시, 10시 30분(3회 운행)

 2)  성지에서상일동역: 11시 미사후(1회 운행)

 3) 소규모 단체 순례자들은 성지 사무실에 연락하면 별도 운행 가능

- 일반버스: 지하철 5호선 명일역 하차 - 성덕여상 앞에서 30번 버스 구산 사거리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