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홍성 지역 순교 사적지

 

 

 

홍성 읍내 순교 사적지

 

 

 

 곳곳에 배어 있는 순교자들의 발자취

 

 

 

- 조양문 -

 

 

* 충청도 지역에서 홍주(홍성의 옛지명) 읍성은 공주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지금의 홍성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관련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말에서 1785년 초에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거주하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내포 신앙 공동체'가 설립되었고, 이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홍성 지역에도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성의 첫 순교자는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이듬해에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이다.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홍성의 순교자는 초기(1791-1801)의 순교자 8명(혹은 9명), 중기(1812-1839)의 순교자 4명과 1866년에 시작되어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 순교자 199명을 합해 모두 211명(혹은 212명)에 이른다. 그러나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을 감안한다면, 실제의 순교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 많은 순교자가 탄행한 이곳은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 순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 현재 교황청에서의 시복 심사가 진행되고 있는 '하느님의 종' 124위 순교자 가운데 원시장 베드로와 방 프란치스코가 홍주 관아에서 혹독한 형벌 속에 장사하였으며,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홍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황일광 시몬은 홍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홍주 관아(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98 홍성군청내) -

 

 

* 홍주 순교자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목사의 동헌인 경사당 앞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중에서 목사가 집무를 보던 근민당은 현존하는 목사의 동헌인 안회당(사적 231호, 현 홍성군청사 경내)이 아니라 그 서쪽에 있던 사달정의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또 홍주 진영(충청도 전영)의 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은 지금은 동문(즉 조양문)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일제 강점기 때의 홍성우편국 사무실)로 추정되고 있다. 초기와 중기 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목사와 영장 앞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병인박해기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포교들에 의해 영장 앞으로 끌려가 경사당 앞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난다.

 

 

 

              

 

 

 

 

 

 

    

     - 홍성군청 내 목사의 동헌인 안회당과 뒷뜰에 세워진 '신앙증거터' 표지석-

 

 

 

 

 

 

 

 

 

 

 

 

 

 

- 옛 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터(사진: 조양문 뒤로 보이는 한국통신 건물)에 세워진  

 '신앙증거터' 표지석-

 

 

 

홍성의 첫 순교자 '하느님의 종' 원시장 베드로(1732-1739)

 

*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 사촌 형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성격이 사나워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그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온화함을 보여 주었고,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 홍주 관장 앞에서 문초를 받은 그는 여러 달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를 배교시킬 수 없었던 홍주 관장은 생각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놓아 얼어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다. 1793년 1월 28일,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하느님의 종' 방 프란치스코(? -1799)

 

* 충청도 면천의 '여'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을 지낸 방 프란치스코는 교우들 사이에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누구보다 빨리 이를 받아들인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교우들 중에서 뛰어났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 자주 눈물을 흘리며 자신도 그들처럼 순교하게 되기를 열망하였다. 1797년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될 때, 그도 다음해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방 프란치스코는 1799년 1월 21일 홍주 읍내에서 순교하였다.

 

 

신앙 증거 장소요 이 지역 최대의 순교지 홍주 감옥터

 

 

 

 

 

 

 

 

 

 

 

 

 

 

 - 홍성군청 근처의 홍주 감옥터(충남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848)에는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이 있었다. 이 건물은 2008년 철거되었고 현재 홍주 읍성 공원 조성을 위한 공사가 진행중이다.-

 

 

*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이내 옥으로 끌려가 고난의 옥살이를 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스스로의 순교 원의를 다짐하곤 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홍주 옥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장소요 순교를 준비하던 의미있는 장소가 된다. 교회 기록에서 밝히듯이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등 113명이 옥중이나 그 인근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기 때문이다.

 

 

홍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하느님의 종' 박취득 라우렌시오 (? -1799)

 

*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고향 인근에 전파된 천주교 신앙을 전해 듣고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면천 관아에 자수하였다. 옥에서 여러 달을 지내며 몇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은 그는 홍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죽도록 매를 치라'는 홍주 영장의 명에 따라 심하게 매를 맞았다. 그동안 모두 1천 4백대 이상이나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그를 옥족들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뒤 밖에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다시 옥으로 끌려간 그는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라고 옥졸들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이틑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댜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들이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들은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1799년 4월 3일, 그의 나이 약 30세였다.

 

 

 

- '하느님의 종' 황일광 시몬이 순교한 월계천변 형장 '참수 순교터' -

 

 

* 홍주성 북문밖, 지금의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 북문교(일명 덕산통)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는 홍주의 또 다른 순교터인 처형장.  소향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지점에서 죄인들을 처형했다는 이 지점은 본래 북문교 아래쪽이었는데, 훗날 둑을 쌓고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문교 위쪽이 되었다고 한다. 1801년 '하느님의 종' 황일광 시몬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옛날 홍주 관리가 읍성 북문(북문교 남쪽 60-70m 지점) 옆의 치에 올라가 신호를 하면 그 신호에 따라 월계천변으로 끌고 간 죄인을 참수형에 처했는데, 그 치가 있던 곳은 지금의 북문 밖 가까운 곳(북문교 하류 200m 지점)으로 습지였던 탓에 오랫동안 미나리꽝으로 사용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또 '원래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해 오던 곳으로, 갑오동학란 때에는 동학군들을 여기에서 처형하였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곳은 홍주성 북문 밖의 월계천변으로, 일반적인 형장의 조건(개천과 백사장,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 등)을 갖추고 있다.

 

 

'하느님의 종' 황일광 시몬(1757-1802)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1792년 무렵 우연히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웠다. 그는 천주교 입교 후 보다 자유로운 신앙 생할을 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애덕으로 감싸 주었다. 양반 집에서까지도 그는 모든 교우들과 똑같이 받아들여졌다. 이에 그는 농담조로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하곤 하였다. 

 

1800년 2월에는 경기도 광주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이웃으로 이주하여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고, 그의 열심은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때 체포되어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질 정도로 잔인하게 매질을 당해야만 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은 황일광 시몬은 '고향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에 따라 고향 홍주로 이송되어 도착하는 즉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802년 1월 30일, 그의 나이 45세였다.

 

 

 

- 새로 조성된 생매장터와 순교자 안장터 주변-

 

 

 

 

생매장터와 순교자 안장터

 

* 1868년 5월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 4명(생매장 추정자는 최대 9명)이 순교한 생매장터는 지금까지 확인된 적이 없었다. 교회 순교록에는 당시 생매장을 했던 이유를 "많은 교우들을 죽이기 어려우매"라는 데 있었다고 한다.

 

최근의 증언에 따르면, '홍성의 옛 숲거리는 홍주에서 희생된 동학군과 의병들의 시신을 안장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천주교 순교자들이 생매장을 당한 장소도 이 부근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곧 옥사와 교수형으로 죽은 순교자나 생매장형으로 죽은 순교자들의 시신 모두 이 숲거리 아니면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인근, 즉 의사교와 의사 1교 부근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홍성의 '홍주 의사총'(사적 431호, 홍성읍 대교리 124-2번지의 의사교 북쪽)은 1906년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홍주 의병들의 유해를 봉안한 무덤인데, 그 유해들은 모두 숲거리에서 발굴되었다.

 

홍주의 천주교 순교자들은 동학 농민군(1894년)이나 의병(1906년)들보다 적어도 25년 이전에 처형되었으며, 한 번에 순교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순교하였다. 이들의 시신을 성밖 여기저기에 묻지는 않았을 것이며, 1868년의 생매장 순교자들은 물론 옥사나 교수형으로 죽은 순교자들이 안장된 장소를 '전통적인 매장지인 숲거리와 그 인근, 즉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인근'으로 보는 견해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 2008년 3월 순교 성지 조성과 함께 세워진 현양비문 -

 

 

 

- 옛 홍주 저자거리에 세워진 표지석 -

 

 

신앙 증거터인 옛 저자거리

 

* 홍주의 저자거리는 순교자들이 관아로 끌려갈 때 혹은 처형되기 전에 조리돌림을 당하며 수난을 겪으면서 신앙을 증거한 곳으로 전승되고 있다.

 

 

* 자료 출처: 천주교 대전교구, 홍성과 해미 성지 자료집, 2006년

 

 

 

 

 

<홍성 지역 순교 사적지 순례 안내>

 

 

* 미사 안내: 홍성 본당(041)633-8891

 

 - 수, 목, 금, 토, 주일: 오전 11시 30분(그외 요청시 가능)

 

* 고해성사: 미사 전

 

* 주차장: 있음

 

* 교통편: 대중교통 이용시

 

- 기차(장항선)를 타고 홍성역에서 하차 - 의사총 맞은편 홍주성지(생매장터)

 

* 홍주 성지는 한 분이라도 연락을 하면 성지 안내 해설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