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 성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사목 중심지
박해기의 교우촌, 내포 지역 신앙의 못자리
- 신리 성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 성당 -
한국 천주교회와 신리 성지
* 신리성지(옛 신리공소)는 당진의 지방사에서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우선 내포 천주교회 창설 초기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박해기 내내 이 지역의 교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우촌(비밀 신앙 공동체로서의 '카타콤브')으로 자리 잡아왔다. 그리고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A. Daveluy, 한국명 安敦伊, 1818-1866) 성인 주교가 오랫동안 거처하던 내포 지역의 사목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며, 다블뤼 주교가『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비롯하여 초기의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고 이를 목판으로 간행한 장소였다. 또한 신리 성지는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본향(못자리)'인 동시에 순교자들의 시신이 안장된 '순교자들의 영원한 안식처(묘자리)'였다.
박해기의 신자들은 신리와 거더리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불러왔다. 조선 후기 행정 구역상으로는 신리와 거더리가 구분되어 있지만, 두 마을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접해 있으므로 하나의 교우촌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 복원된 손자선 성인의 생가이며 다블뤼 주교께서 사시던 주교관 -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성인 주교가 최후의 사목 중심지로 삼은 교우촌
* 합덕의 신리(거더리) 지역에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1790년대에는 이미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 교우촌은 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에는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다.
성지 내 초가집은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이다. 동시에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성인 주교의 주교관이자 조선교구청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이곳에서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 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이루어졌다. 이 자료들은 훗날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다.
본디 '천주강생 1815년'에 지어진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몇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거듭해 왔다. 1964년부터는 강당의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른다. 이후 성지개발이 본격화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생가의 옛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가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되어 2004년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복원된 생가(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 때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또한 신리 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그리고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순교자들의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
* 충청남도의 병인박해는 거더리의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곳 출신의 첫 번째 순교자는 1866년의 병인박해로 공주에서 순교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다. 손자선 성인 이후 신리(거더리)에서는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는데, 기록에 나오는 숫자만도 서울, 수원 순교자 22명, 공주와 홍주, 해미 순교자 14명 등 도합 36명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1866년 3월 30일 보령 수영의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매뜨르 신부, 황석두 루카 회장 등 4명의 성인도 신리(거더리)에서 활동하거나 이곳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순교자들이다.
-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의 술책에
자신의 양쪽 팔의 살점을 이로 물어 뜯어내며 신앙을 증거하는 손자선 토마스 성인 -
성 손자선 토마스(? - 1866)
* 충청도 덕산군 홍주면 신리 마을 거더리에서 3대째 천주교를 믿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다블뤼 주교가 1866년 3월 11일 거더리에서 체포된 지 4-5일 후, 덕산의 포졸들이 거더리 마을의 몇몇 신자 집을 약탈하였는데, 얼마 후 덕산 관아로부터 약탈당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손자선 혼자 그 물건들을 찾으러 갔다가 천주교 신자인지를 묻는 관리의 질문에 천주교 신자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이에 곧 체포되어 관아에서 오물을 뒤집어 쓰는 모욕들 당하였으며, 해미로 이송된 후에는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혹형을 받았다. 또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후에는 믿음의 증거로 살점을 물어 뜯어보라는 관장의 명령에 자신의 팔을 물어뜯을 만큼 굳은 의지를 보였으며, 온갖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어 보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손자선은 1866년 부활 전날인 3월 31일 공주 감영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순교한 뒤 그 시신이 가족들에 의해 신리 인근의 "말파동"이라고 불리는 곳에 안장되었다.
순교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신리 성지 무명 순교자 묘역-
* 신리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머리 없이 발견된 무명 순교자의 묘와 14기의 손자선 가족 묘 등 40여기의 순교자 묘가 대전리 공동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참고 자료: 천주교 대전교구, 『여사울, 성거산, 신리, 갈매못 성지 자료집』, 2007.
<신리 성지 순례 안내>
* 미사 시간: 매일 오전 11시(월요일: 오전 7시)
순례시 미리 전화로 미사 시간 조절 가능
* 고해성사: 매 미사 전후
* 기타 사항:
- 식당: 있음(400명 식사 가능)
- 주차장: 있음
* 교통편: 대중교통 이용시
- 남부터미널(2시간 간격) - 합덕터미널 - 택시(약 10분) 혹은 버스(약 2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