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마재 성지

 

 

 마재 성지

 

 

복자 정약종과 그의 가족들 

 

 

- 마재 성지-

 

 

 

마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마재의 나주 정씨 형제들은 초기 교회 창설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들 형제들 가운데 초기 교회사에서 대표적 역할을 하였던 정약종과 그의 가족들의 숭고한 순교 신앙의 여정은 그들의 삶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로 하여금 마재로 발걸음을 향하게 한다.

 

마재가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되기 시작한 시기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이전부터이다. 이곳에 있던 나주 정씨 집안의 후손들은 18세기 후반부터 한역서학서를 읽게되었다. 그중에서 정약전은 1779년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주도로 주어사(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 강학회에 참석하여, 이벽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1784년에 마재를 방문한 이벽은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상경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들 형제 중에 특히 초기 교회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인물은 정약종이다. 그는 정재원과 윤덕열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로는 이복형인 정약현이 있었다. 정약현의 부인은 이벽(1754~1786)의 누이였고, 정약현의 딸은 황사영(1775-1801)의 부인이었다. 정약종의 친형제로는 형 정약전(1758-1816)과 동생 정약용(1762-1836)이 있었다. 정약종의 어머니는 윤지충(1759-1791)의 고모였다. 그리고 이승훈(1756-1801)은 정약종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이러한 그의 가문을 보면 그가 천주교 창설과 관련된 인물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학문을 사랑하고 널리 연구했던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정약종은 당시의 학인들이 일반적으로 지향하던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과거를 위한 학문은 너무 무게가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완전히 포기했고", 불로장생의 비법을 논하던 도교에 탐닉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뒤인 1786년 형에게서 교리를 접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교회의 중추적 인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의 개종은 그의 형제를 비롯한 다른 남인계 인물들보다도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세 입교를 통해 그가 가지고 있던 지상천국적 현세나 미래사회에 대한 갈망을 천주교 신앙 안에서 용해시켜 나가게 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정약종이 초기 교회의 입교자들과 다른 측면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자신의 회의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망설임과 비슷한 점을 생각하면서, 세례를 받을 때 이 이름을 취하여 세례명으로 삼았다.

 

1791년 조상제사 문제로 발생한 진산사건 이후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대거 배교했다. 그에게도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압력이 들어왔지만, 그는 천주교 신앙을 계속해서 지켜나갔다. 특히 그의 부친이나 자신의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으로부터도 신앙의 포기를 촉구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오히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서학을 익힐 수 없으니 자신의 죄가 아님이 없다."고 까지 했다.

 

정약종은 교리 지식에 해박하였다. 황사영 <백서>에 의하면, 그는 "성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세어 무엇에나 자상하고 세밀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영세 입교 후에도 천주교 학문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고, 이 연구가 습관과 성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간혹 한 가지 도리라도 불명한 것이 있으면, 자고 먹는 일마저 잊고서 전심전력으로 이를 사색하여 말 위에서나 배를 타고 갈 때에라도 모두 묵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 음력 2월 26일(양력 4월 8일) 서울, 정 아우구스티노 약종이 참수당함. 아우구스티노는 그 집안이 탄생시킨 학문에서나 관직에서 뛰어난 사람들로 명망있는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는 1760년에 광주 고을에 있는 마재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그의 신중함과 학문에 대한 그의 열의로 주목을 받았다...... ." 

- 성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일부 -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정약종은 주 신부를 도와 교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주 신부로부터 명도회장에 임명되었다. 명도회는 교리를 연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도움을 주고 받는 신자들의 단체였다. 천주교 교리 연구에 전념하였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정약종은 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어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신앙을 널리 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여러 종류의 한문 천주교 서적들을 참고해서 <주교요지>를 지었다. 민중들의 표현 수단인 한글로 쓰여진 이 책은 한국인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저술된 교리 서적이었다.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쓰여진 최초의 한글교리서 <주교요지>  부분-

 

 

 

1800년 양근 지방의 박해로 정약종의 가족은 마재에서 서울로 피난하였으며, 이때 정약종의 아내 유 체칠리아와 자녀인 정하상과 정정혜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가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자 정약종의 유족들은 5촌 조카의 도움으로 다시 마재로 돌아왔다. 그러나 친척들의 냉대로 극도의 빈궁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들 가족은 꾸준히 신앙을 키워 나갔으며, 1814년 상경한 정하상은 1816년부터 조선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후 정하상이 마재에 있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서울로 오게 함으로써 일가는 마재를 떠나게 되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1839년 기해박해때 앞서 순교한 부친과 정철상의 뒤를 이어 서소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아내 유소사 체칠리아는 79세의 고령임에도 혹한 형벌을 참아내며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지내다 옥사하였다.

 

1984년 정약종의 가족 순교자 가운데 유소사 체칠리아, 정하상 바오로와 정정혜 엘리사벳이 성인품에 올랐다.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은 2014년 8월 16일, 그들이 신앙을 증언하고 사형을 판결받았던 땅, 현재의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시복되었다.

 

마재. 이곳에서 하느님의 종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의 신앙이 시작되었다. 정약종은 세례를 받고 교리를 연구하면서 천주교 사상가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아들 정철상 또한 부친의 뒤를 이어 흔들림 없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집안 친척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종용하며 송곳으로 찌르기도 하였지만 하느님을 향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의정부교구는 2007년 12월 이곳에 한옥성전를 마련하였고, 맞은 편의 약종동산에는 순교자들이 긴칼을 목에 두르고 고통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던 칼 모양의 십자가, 성모자상, 십자가의 길과 그 길의 끝에서 마주하는 못박히신 청동 예수님의 발을 만나게 된다.

 

 

 

 

 

 

 

 

 

 

 

 

 

 

 

 

 

 

 

 

 

 

 

 

 

 

 

 

 

 

 

 

 

 

 

 

 

 

    

- 성모자상 -                 

 

 

 

 

 

 

 

- 순교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였던 고통과 희망의 칼모양의 십자가 -

 

 

 

- 십자가의 길 -

 

 

 

-  제8처와 9처로 향하는 십자가의 길,

그 여정에서 순례객은 청동예수성심상의 손을 잡고 그분의 사랑에 잠긴다 -

 

 

 

 

 

 

 

 

 

 

 

 

 

 

 

 "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십자가의 길,

그 길의 끝에서 ...

 

 

 

 

 

 

 

 

 

 

 

 

 

 

 

 

- 약종 동산 -

 

 

* 마재성지에서는 이곳 출신 하느님의 종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하느님의 종 정철상 가롤로를 포함한  124위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기원하는 소공동체 기도모임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는 각자 개별적으로 시복 시성을 위한 기도를 바치며, 매월 정해진 하루에 이곳에 모여 미사 참여 후 순교자 시복 시성을 위한 공동체 기도모임을 갖는다.

 

 

 

 

 

        

- 다산 유적지의 다산 정약용 동상 -

 

 

다산 정약용. 그는 1784년 처음 천주교 교리를 들었는데,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천지가 창조되는 시원이나 신체와 영혼 또는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들으니 놀랍고 의아하여 마치 은하수가 무한한 것과 같았다. 서울에 돌아오자 이벽을 따라가 <천주실의>와 <칠극> 등 몇 권의 책을 보고 비로소 기뻐하여 마음이 기울어졌다." 

 

천주교 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강한 비판과 견제를 받아야만 했던 그는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40세부터 57세까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고향 마재로 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마무리하였다.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오랜 유배생활의 고된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는 우리 사상사에서 가장 방대하고 창조적인 업적을 남겨 주었다. 19세기 말 그는 고종의 관심과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다시 세상에 빛을 내게 되었다.

 

 

 

- 마재 고향집 뒷동산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묘 -

 

 

 

 

<마재 성지 순례 안내>

 

 

* 미사 시간: 매일 오전 11시(화요일-주일), 월요일 없음

 

* 고해성사: 오전 10시부터

 

* 교통편: 대중교통 이용

 

- 서울에서 지하철 1호선 팔당역 하차 - 양수리 방면 버스 이용 능내역 하차 - 능내역사에서 왼쪽으로 돌아 철길 건널목 건너편 능내교회 - 100m 직진 마재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