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신축교안 희생 무명 교우들과 황사평 묘역
-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무명 교우들이 안장된 합장묘 -
기나긴 여정
1801년, 신유박해때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 알렉시오가 순교하자 그의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당시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형을 받고 제주도에 발을 디뎠다.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선교사들과 함께 귀국하다 표류하여 제주도 서쪽 용수 포구에서 배를 수리한 뒤 충청도로 떠났다.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제주 사람 김기량은 풍랑으로 표류하던 중 구조되어 홍콩에서 조선인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1857년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경상도 통영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후 제주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이다. 제주 출신 양용항 베드로가 1898년 4월경 육지에서 세례를 받고 제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제주교안
'교안'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국가 정책이 전면 박해에서 전면 개방으로 옮겨가는 과도 이행기에 생겨나는 종교 문제 또는 종교 문제와 관련되어 벌어진 다툼이 정치적, 행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안을 표현하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 역사 용어이며, 특정 종교의 의식을 담은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교안이며 최대로 인명의 희생을 초래한 참극이었다.
당시 전제 군주 체제의 강화를 꾀하던 대한제국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하여 1900년 제주에 파견된 봉세관(封稅官) 강봉헌이 공유지에 대한 무리한 징세를 하면서 토착 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여기에 조세 중간 징수 관리자로 이용된 일부 신자들로 인해 교회는 많은 오해를 받고 있었다.
천주교의 제주 선교는 외국인 및 이문화에 대해 폐쇄적이던 제주도민의 습성과 뿌리깊은 무속 신앙으로 전교 활동을 어렵게 하였지만, 일부 서민층과 향리와 유배인 등이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으면서 차츰 제주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교회의 무리한 전교 활동과 왕실 조세 정책에 저항한 민회(民會)가 대정현(모슬포)에서 열리면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사건으로 700여 명의 신자들과 양민들이 관덕정 등지에서 피살되었다. 제주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300-350명 정도로 보고 있다.
제주에서의 사태가 진압된 후에도 서울을 무대로 한 사후 수습 과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제주교안은 계속 이어졌다. 뒤처리의 현안 문제는 주모자에 대한 재판과 처벌 문제, 피살 희생자에 대한 휼금 배상(恤金賠償)의 문제와 피살 희생자의 묘지인 영장지 문제 등 세 가지였다. 주모자에 대한 재판이 끝나고, 1903년 4월 29일 제주교안 희생자들의 매장지가 황사평(현 제주시 화북2동)으로 결정되었으며, 그해 11월 17일 영장지 문제가 타결됨으로써 제주교안은 최종 마무리되었다.
- 제주 관덕정 -
- 황사평 묘역 신축교안 희생자 합장묘와 병인박해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현양비 -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져 버려지듯 가매장되었다. 이후 사태가 진정된 후 교회에서는 별도봉 밑에 묻혀 있던 무연고 시신을 황사평으로 이장하여 천주교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아 공원묘지로 새롭게 단장하였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참혹한 교안으로 희생된 무명의 시신들이 묻혀 있는 이곳 황사평에는,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현양비와 제주교구의 초대 주교인 현 하롤드 대주교, 성직자들의 묘, 외국 선교사들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 초대 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 묘소 -
- 별도봉 기슭에서 내려다 본 제주항 -
1901년 신축교안 순교자들을 기리며 걷는 순례길을 "신축 화해의 길"이라 부른다. 이 길은 황사평 순교자 묘역을 지나 화북포구, 곤을동, 별도천과 관덕정 등을 거쳐 중앙성당에 이르는 코스로 당시 제주의 천주교 신자들이 겪어야 했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하는 "고통과 화해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