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용수 성지

 

 

용수 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

 

 

- 성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

 

용수 성지

용수리 포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한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푸동 지역에 있는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신부들과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은 후, 김대건 신부는 8월 24일 다블뤼 신부를 복사로 횡당(橫塘) 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우리는 며칠 후 큰 위안을 가졌습니다. 주교(페레올 주교)는 안드레아에게 사제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식은 상해에서 20~30리 떨어진 교우촌 김가항 성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4명의 서양 신부, 1명의 중국 신부가 참석하였고, 또 거기에 신자들이 무리를 지어 참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가능한 한 성대함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인 첫 사제를 볼 때 우리의 기쁨이 어떠하였는지 당신(바랑 신부)께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다블뤼 신부가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5년 8월 28일자 서한>

 

 

 

 

 

 

 

김대건 신부 일행은 조선으로의 귀환을 위해 타고 온 배를 수리한 다음, 배의 이름을 여행자의 수호성인인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라파엘(Raphael)호'라고 불렀다.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 등은 라파엘호를 타고 출항하였으나 비가 자주 오고 맞바람이 세찬 까닭에 양자강 하구에 있는 숭명도(崇明島)에 정박하여 순풍을 기다린 후 9월 8일 조선으로의 항해를 다시 시작하였다.

 

조선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폭풍우를 만나 키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강한 역풍을 만나 9월 28일 제주도의 용수포구에 표착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잠시 머문 후 출발하여 10월 12일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구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로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에 맞아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서울, 용인 일대에서 사목활동을 하다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던 중, 1846년 6월 5일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해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6월 23일부터 7월 19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처음 문초에서는 중국인 광동 출신인 우대건이라고 하다가 여섯 번째 문초 때 외국인이 아니라 용인 태생 김대건이며, 신학 공부를 위해 동료등과 함께 마카오에 유학한 사실을 실토하였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는 혹독한 고문에도 '하느님을 위해 죽겠다'라고 하면서 신자들과 조선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임치백에게 세례를 주었다.

 

1846년 9월 16일(음력 7월 26일)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만 25세였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7일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 기념관 내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흉상 -

 

성 김대건 신부가 간직하였던 성모님 상본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상과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복원한 라파엘호가 야외에 건립되어 있다.

 

 

- 기념관 내부 성 김대건 신부의 주요 활동 지도 -

 

- 표착 기념관 옥상에서 바라본 용수 포구 -

 

 

- 김대건 신부의 제주 표착을 기념하기 위한 성 김대건 해안로-

 

 

 

<성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관 내 용수 성당 미사 안내>

 

* 매주일 오후 7시 30분

* 이외의 요일에 미사를 봉헌하고자 할 경우(20명 이상 가능) 기념관

  사무실로 문의 (064)772-1252

* 단, 신부님이 동행할 경우에는 인원제한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