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삼 요한 성인 묘소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
남종삼 요한 성인과 그 가족의 묘소로, 남 요한 성인의 순교 이후 공주에서 순교한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와 창녕현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순교한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의 묘, 창녕현으로 유배 갔던 막내 아들 남규희의 묘가 있다.
1865년 말 러시아가 수시로 남하하여 영토를 침입하고 위협하며 통상을 요구하자, 남종삼 요한은 서양 프랑스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치자는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했다. (이러한 건의를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고 칼레 신부의 순교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흥선대원군도 처음에는 베르뇌 주교와 만남을 원하는 듯하였으나 러시아가 물러나는 등 상황이 바뀌자 오히려 1866년 2월부터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결국 만남을 주선하고자 했던 남종삼 요한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50세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박순집 바오로에 의해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1967년 시복을 계기로 그해 10월 절두산 순교 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역인 이곳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2018년 9월에 이곳에 성인의 새 묘비를 세우고 축복하였다.

남종삼 요한 성인(1817-1866)
남종삼 요한은 조선 후기 남인계 학자로 1817년(순조 17년) 남탄교의 아들로 태어나, 장성한 뒤 백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의 양자가 되었다. 양부 남상교는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남 요한은 22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 영해 현감 등을 거쳐 철종 때 승지에 올랐으며, 고종 재위 초기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북경조약 이후 연해주 지역을 러시아가 차지하게 되면서 자주 조선으로 넘어와 통상을 강요하여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던 때에, 남종삼 요한은 선교의 자유를 약속할 만큼 천주교에 호감을 표시했던 흥선대원군에게 러시아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방도(방아책)를 강구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건넸다. 하지만 정세가 바뀌자 마음을 바꾼 대원군과 반대 세력들은 오히려 그를 모반부도의 죄목으로 참수형을 선고하였다. 남 요한은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하느님의 종 홍봉주 토마스와 함께 순교하였다. 한편 이들의 시신은 형장에서 사흘간 그대로 있다가 거기서 조금 떨어진 밭으로 옮겨져 보름 동안을 버려져 있었다. 이때 비로소 몇몇 용감한 신자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할 수 있었다.
남 요한의 순교 뒤 남은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다.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와 큰 아들 남명희는 함께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를 한 감옥에 두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당시 14세였던 남명희는 전수로 이송되어, 국법에 따라 성인(15세)이 되는 이듬해 홍봉주 토마스의 아들과 함께 전주 초록바위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창녕현으로 유배된 요한의 아내 이조이 또한 그곳에서 순교했다.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들이 나온 것이다.
1885년 조정의 사면 조치로 남요한은 모반부도 죄의 누명을 벗었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성당에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관련 성지: 묘재 성지(원주교구)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