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삼 요한 성인 묘소
'죄인 남가의 사형 선고문'
높은 관직에 올랐던 그 자는 온 마음을 기울여 사교를 따르고 전파했으며
오래 전부터 그것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참된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교를 그는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교리라고 말했다.
그의 모든 죄를 생각하면 만 번 죽어도 벌이 가벼울 것이다.
- 경기도 장흥의 남종삼 성인의 묘역 -
*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분인 남종삼 요한은 조선 후기 남인계 학자로 1817년(순조 17년) 남탄교의 아들로 태어나, 장성한 뒤에는 백부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22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 영해 현감 등을 거쳐 철종 때 승지에 올랐으며,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 북경조약 이후 연해주 지역을 러시아가 차지하게 되면서 자주 조선으로 넘어와 통상을 강요하여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던 때에, 그는 선교의 자유를 약속할 만큼 천주교에 호감을 표시했던 대원군에게 러시아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방도를 강구하는 내용을 편지를 가지고 갔으나 정책을 바꾼 대원군과 반대 세력들에 의해 모반부도의 죄목으로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866년 3월 7일(음 1월 21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동료인 홍봉주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 그가 순교한 뒤 남은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이때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처 이소사와 자식들은 각처로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였다. 그중 이소사는 유배지 창녕현에서 훗날 순교하였다. 그의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셈이다.
* 남종삼은 그후 1885년 조정의 조치로 모반부도의 죄를 벗게 되었고,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성당에서 복자 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제일은행 본점 앞의 '의금부 터' 표지석 -
* 1866년 3월 1일 서울 근처의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남종삼은 국청에서 모두 6회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나갔으며, 오히려 천주교가 정도라는 호교론을 펴나갔다. 당시 의금부에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 그리고 여러 선교사들이 투옥되어 있었는데, 남종삼이 체포된 후 함께 국문하라는 지시에 따라 다음날부터 국청이 개설되었다. 여러 차례의 신문은 이미 지니고 있던 순교 의지만을 굳어지게 해줄 뿐이었다.
- 남종삼 성인이 모반 부도의 죄목으로 참수형을 받고 동료 홍봉주와 함께 순교한 서소문 밖 성지 -
" (남종삼)요한과 (홍봉주) 토마스의 시체는 형장에 3일간을 남겨진 채로 있다가 거기서 조금 떨어진 밭으로 끌려가 완전히 보름 동안을 버려져 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몇몇 용감한 신자가 시체들을 거두어 매장할 수가 있었다."
-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하권 중에서 -
- 남종삼 성인의 장자인 남명희가 순교한 전주 초록바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