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11 원시보 야고보
원시보 야고보

11. 원시보 야고보 (1730-1799)

 

원(元)시보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 출신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 베드로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시보’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디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하였던 원 야고보는,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온갖 덕행을 실천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였고, 금요일마다 단식을 하였으며,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점차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홍주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즉시 원 야고보와 사촌인 원 베드로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순교하였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원 야고보는 사촌과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795년 무렵, 원 야고보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첩을 내보냈다.

이로부터 2년 뒤에는 정사박해가 충청도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원 야고보도 1798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혹형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해 천주교를 봉행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몹시 두들겨 맞았으며, 형벌로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에 원 야고보는 감사의 명령에 따라 병영(兵營)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가 덕산을 떠나는 날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서는 안되네. 모든 고통을 참아 낸다면 기쁨 가운데서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게. 이성을 잃고 대사(大事)를 그르칠 수는 없네.”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원 야고보는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당하였다. 관장은 그를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순교의 원의로 가득찬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덕산에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졌던 원 야고보에게 다시 온갖 혹형이 가해졌으며, 그는 결국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가 1799년 4월 17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원시보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약 50가족 가량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