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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느님의 종 박상근의 묘소112. 박상근 마티아 (1837-1867)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박 마티아는 평소에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대세를 주곤 하였다. 이후 그는, 칼래(N. Calais, 姜)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그해 3월 중순경에 좁쌀을 사려고 칼래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에 갔다가 칼래 신부를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 와서 숨겨 주었다.
3일 뒤 박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으려고 다시 한실로 갔다. 이때 칼래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면서 마티아에게 집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되돌아와 있던 박 마티아는, 얼마 뒤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를 봉행한다.”고 명백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박 마티아는 형벌을 받고 옥으로 돌아오면 함께 있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그러한 모습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렀다. 박상근 마티아는 마침내 관장의 명에 따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하기 직전에 박상근 마티아는 성호를 긋고는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순교한 다음, 가족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가 고향에 안장하였다.
* 칼래 신부(Nicolas A. Calais, 1833-1884): 리델 신부, 페롱 신부와 함께 병인박해 때 살아남아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후 차쿠에서 조선 재입국을 백방으로 모색하고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전기를 남겼다. 1869년 심각한 병환으로 프랑스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1883년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