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문영인 비비안나 (1776-1801)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는 한양에 거주하던 중인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일곱 살이 되던 1783년에 궁녀로 뽑혔다. 그때 작은 벼슬을 하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은 딸들은 숨겨두고, 어린 문 비비안나와 동생들만을 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관리들은 문 비비안나의 총명함과 용모를 보고 궁녀로 선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비안나는 궁궐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글씨를 잘 쓰게 되자 궁궐에서는 그녀에게 문서 쓰는 일을 맡겼다.
스물한 살 되던 1797년에 비비안나는 병에 걸려 잠시 궁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그녀는 한 노파로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고, 얼마 뒤에는 그 노파로부터 교리를 배웠다.
문영인 비비안나는 그 뒤,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알게 되었다. 그리고 1798년에는 그녀의 집으로 가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가끔 강 골룸바의 집을 찾아가 교우들과 함께 교회 서적을 공부하거나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문 비비안나는 병이 완쾌되면서 다시 궁궐로 들어가야만 하였다. 물론 궁궐에서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최선을 다하여 기도 생활을 하였는데, 끝내는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제 문 비비안나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 데만 노력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모범을 본받으려고 하였으며,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는 동안, 자주 순교의 뜻을 드러내곤 하였다. 그러다가 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자, 청석동에 집을 얻어 살면서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또 1800년에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해 오자 그에게 집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문 비비안나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순교할 때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녀는 혹독한 형벌 도중에 정신이 혼미해져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라고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이후 문 비비안나는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열심히 교리를 설명하면서 천주교 신자임을 증명할 뿐이었다. 이때 그녀가 형조에서 한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포도청에서의 첫 번째 진술에서는 비록 천주교를 배척한다고 했지만, 돌이켜 보건대 입으로는 배척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실제로 배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곧 진술을 번복한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독실히 믿어온 신앙인데,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형조에서는 이제 문 비비안나의 마음을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녀의 죄목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끝내 이를 뉘우치지 않으니, 만 번 죽여도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녀는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는 동정녀로서 25세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문영인 비비안나가 형벌을 받을 때에 다리에서 나오는 피가 꽃으로 변하여 공중으로 떠올랐고, 참수를 당할 때는 목에서 나오는 피가 젖과 같이 희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