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38 최인철 이냐시오
최인철 이냐시오

38. 최인철 이냐시오 ( ? -1801)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철(崔仁喆) 이냐시오는 한국 천주교회 설립 초기에 형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1795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인길 마티아가 그의 형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최 이냐시오는 형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다. 그때 형조에는 이미 여러 동료들이 끌려와 있었다. 이후 최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협박과 회유, 형벌을 번갈아 받아야만 하였다. 그 과정에서 형 최인길과 몇몇 신자들은 이에 굴복하였지만, 최 이냐시오만은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에게 뉘우칠 기회를 주려고 3일 동안 집으로 돌려보냈다.

최 이냐시오가 집으로 돌아오자 늙은 어머니와 형제들은 눈물로 호소하면서 배교를 권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형조로 들어가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돌려 “비록 매를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도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임금의 회유를 받아들여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석방되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최 이냐시오는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쳤다. 그리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형과 함께 교회 일을 도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특히 형 최인길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영입하는 데 힘썼으며,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려고 새로 집을 사기도 하였다. 그렇게 주 야고보 신부의 피신을 돕다가 자신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형이 순교한 뒤, 최 이냐시오는 교회 지도층의 일원이 되어 더욱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주문모 신부가 위험할 때마다, 그 피신을 돕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 이냐시오는 외숙모의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언하였다. 오히려 그는 관리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가면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역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죄목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 1791년에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린 죄
· 1795년에 형이 죽은 뒤에도 천주교를 신봉한 죄
· 동료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널리 전파한 죄
· 체포된 후에도 천주교 교리를 훌륭하다고 설명한 죄
·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그를 섬긴 죄

이에 따라 최인철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발췌: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