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45 김정득 베드로
김정득 베드로

45. 김정득 베드로 (?-1801)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金丁得)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태어나, 친척인 김광옥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가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 베드로는 김 안드레아와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탓에, 포졸들이 쉽게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고 말았다. 이후 베드로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홍주 관장은 김 베드로가 끌려오자마자, 그를 배교시키려고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김 베드로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김정득 베드로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의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김 베드로와 김 안드레아는 천상의 기쁨에 가득 차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김 베드로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