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44 김광옥 안드레아
김광옥 안드레아

44. 김광옥 안드레아 (1741?-1801)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으로 일하였다. 본디 그는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나운 성격 때문에 모두 무서워하였다. 대구에서 1816년에 순교한 김희성 프란치스코가 그의 아들이다.

김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이웃은, 이때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놀라워하였다.

이후, 김 안드레아는 드러나게 교리의 본분을 실천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날마다 교우들과 한자리에 모여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고, 사순 시기마다 금식재를 지키고 갖가지로 극기 행위를 실천하였다. 그러면서 마침내 이전의 성격을 극복하고 어린양과 같이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김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김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예산 현감은 김 안드레아가 체포되어 오자, 바로 공범자들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내놓으라고 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두 번째 신문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용맹함을 드러내었다.

 

“모든 언약이나 위협이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저도 천주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대군대부(大君大父)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부당합니다. 우리 천주께서 저의 비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보고 계시므로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현감은 김 안드레아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매질을 시켰으나 헛일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김 안드레아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안드레아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생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면서 제멋대로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물건들을 감추어 두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김 안드레아와 김 베드로는 그동안의 형벌 때문에 걸음을 뗄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용기와 힘으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튿날 김광옥 안드레아는 들것에 실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 기도를 바쳤다. 또 지정된 장소에 이르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에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누였다. 그리고 두 번째 칼날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 가량이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