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52 윤지헌 프란치스코
윤지헌 프란치스코

52.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1801)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시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가 그의 형이다.

윤 프란치스코는 1789년에 형 윤 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에 앞서 윤지충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안되어 인척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서 읽어 보고 오랫동안 그 내용을 탐독한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1787년에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아우 윤 프란치스코와 함께 열심히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갔다.

1791년에 형이 순교하자, 윤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베껴 읽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또 1795년에는 고산의 운동을 방문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이후에는 교회의 밀사인 황심 토마스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윤 프란치스코의 교회 활동이 관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혔으며,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는 이미 드러난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하였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천당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해자들은, 교회 밀사가 북경을 왕래한 이유를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윤 프란치스코는 조정의 명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뒤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으며,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