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김사집 프란치스코 (1744-1802)
‘성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金)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良家)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만 노력하였으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김 프란치스코의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은 복음 전파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책들은 하나 둘씩 포졸들에게 압수되었다. 이내 그의 이름이 관청에 보고되었고, 관청에서는 배교자 2명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그들이 김 프란치스코의 집을 탐문하고 돌아간 지 얼마 안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김 프란치스코는 관장에게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관장이 죄수들에게 매질을 하는 천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지만, 이것마저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하고 당부하였다.
같은 해 10월, 김 프란치스코는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2개월 뒤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엄동설한에 해미에서 청주로 가는 3일간의 180리 길은 김 프란치스코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인종(忍從)과 마음의 평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청주로 이송된 지 얼마 안되어 김 프란치스코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는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목격한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신·망·애 삼덕(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