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70 김시우 알렉시오
김시우 알렉시오

70. 김시우 알렉시오 (1783-1816)

 

일명 ‘시회’ 혹은 ‘시우재’라고 하는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는 1783년 충청도 청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성품이 착하고 어질었으며,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인 탓에 혼인을 할 수가 없었고, 일하기가 어려워 가난하게 생활해야만 하였다.

일찍이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김 알렉시오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누이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였으므로 이곳 저곳으로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애긍을 받아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때때로 왼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고 약간의 돈을 얻기도 하였다.

김 알렉시오는, 고향을 떠나 교우들이 살고 있는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다가 1815년 초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에 포졸들이 쳐들어와 교우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자원하여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이때 그는 포졸들에게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병신이라서 잡아가지 않는군요?”라고 울면서 말하였고, 함께 체포해 가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안동으로 끌려간 김 알렉시오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가 보여 준 굳건한 신심은 형리들조차 칭찬할 정도였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박해자들에게 이해시켜 주려고 노력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신앙을 증거한 김 알렉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다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시 한번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수난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감사는 김 알렉시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그의 턱을 부수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사형 선고문을 작성하여 서명을 받은 다음 옥으로 돌려보냈다.

“김시우는 스스로 천주교의 소굴이 되어 늘 교리를 전하고 익혔으며, 십계는 물론 남들이 외우지 못하는『칠극』이나 묵주의 기도 등도 외우고 있다. 그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교회 서적을 감추어둔 곳에 대해서는 단지 그 지명만을 이야기할 뿐이고, 누구에게 서적을 나누어주었는지는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진술하지 않았다.”

옥에 갇힌 김 알렉시오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다. 다른 죄수들처럼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대구로 이송되어 온 지 약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로 인한 상처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16년 음력 10월 이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는데,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한 때였다.

이후 오랫동안, 조선 신자들 사이에서는 김시우 알렉시오의 열심과 재능, 변론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또 이를 듣는 모든 신자가 그를 교회의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