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74 김희성 프란치스코
김희성 프란치스코

74. 김희성 프란치스코 (1765-1816)

 

교우들 사이에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 안드레아가 바로 그의 부친이다.

김 프란치스코는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을 배워 왔으나, 아버지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를 버리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어 기도와 애긍 생활을 실천해 나갔으며, 언제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다.

아버지가 1801년에 순교하자, 김 프란치스코의 열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김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고신 극기를 실천하였다. 또 급한 성격을 극복하는 데 노력한 결과, 오래지 아니하여 양순함과 인내의 모범이 되기에 이르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곧은장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김 프란치스코는 산에 올라가 있었는데, 포졸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아들 문악이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나는 천주의 명을 따라 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거라.

그런 다음 김 프란치스코는, 아주 기쁜 낯으로 하산하여 포졸들은 물론 밀고자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상냥한 말로 위로하였으며, 아내에게는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자식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부탁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웃는 낯으로 포졸들을 따라나섰다.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동 관장은 그를 김종한 안드레아와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고,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 프란치스코는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대구 감사는, 김 프란치스코의 심지가 너무 굳은 탓에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한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당시 대구 감사가 조정에 올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희성은 집안에 천주교 서적을 숨겨왔으며, 평소에 십계명과 같은 요사한 글들을 이웃과 함께 외우곤 하였습니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내려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