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이시임 안나 (1782-1816)
1782년 충청도 덕산의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나이가 들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의 집안은 본디 무관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 요한이 그녀의 오빠이다.
이 안나의 부친은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를 다닐 때면 천주교 신앙을 문제 삼아 자식들에게 악담을 퍼붓곤 하였다. 그러다가 죽기 2년 전에야 비로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교리 실천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다.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는데, 이 때문에 가족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가족의 괴로움을 덜어주고자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이때, 성이 박씨(朴氏)인 한 교우 뱃사공이 이 안나를 그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뱃사공은 그녀와 함께 있게 되자 마음이 달라져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녀의 남편은 몇 해 안 되어 사망하였고, 그녀는 어린 종악이를 혼자 길러야만 하였다.
과부가 된 다음에도 이 안나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신자들이 모여 사는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그녀는 1815년 을해박해를 겪게 되었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 안나는 우선 안동으로 끌려가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또한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결코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판결을 내리지 않다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뒤에야 임금의 재가를 얻었다. 이때 대구 감사는 끝까지 신앙을 증언한 신자들을 형장으로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종용하였는데, 이에 대한 이 안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예수님과 마리아께서 저희를 부르시면서 같이 천국으로 올라가자 하시는데, 어떻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이 안나는,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34세였다. 이시임 안나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