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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감영, 대안 성당80. 김화춘 야고보 ( ? -1816)
김화춘 야고보[金若古排]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청라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 베드로가 그의 형이다.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던 김 야고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형과 함께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큰 힘이 되고자 애썼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언제나 기도 생활과 성경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좀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경주 포졸들이 청송 일대의 신자들을 수색하고 다닐 때, 김 야고보도 그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이 제시한 온갖 유혹을 거절하고, 혹독한 형벌을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구성열 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대구에서 여러 달을 갇혀 지내는 동안, 김 야고보는 여러 차례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감사도 마침내 그의 신앙에 굴복하여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다. 이때 그에게 내려진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김화춘은 아버지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배워 대대로 죄악을 저질러왔다. 모두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로, (천주교 교리를) 귀로 전해듣고 입으로 외우면서 그 사악한 말을 깊이 믿었다.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니, 그 요사하고 사악함이 아주 지극하다.”
김화춘 야고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윤허가 내려와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야고보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