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94 김대권 베드로
김대권 베드로

94. 김대권 베드로 ( ? -1839)

 

김대권(金大權) 베드로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청라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 야고보는 바로 그의 아우이다.

김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워 왔으나, 열심히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였다.

김 베드로는 한때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이 무렵에는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는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을 뻔하였다. 그 사고 뒤에 그들은 지난 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김 베드로는 언제나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계명을 지키는 데에 열중하였다. 주일마다 이웃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주님 성탄 대축일이면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면서 밤을 새웠다. 언젠가는 호랑이가 그의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는데,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기도를 다 하고 내려왔다. 사순 시기 때면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 한끼의 식사만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아우 김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도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밝혔다.

김 베드로는,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27년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오래지 아니하여 포졸들이 그 마을로 들이닥치자, 김 베드로는 웃는 얼굴로 그들 앞에 나아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고산에서 한 차례 신앙을 증언한 김 베드로는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서적을 갖다 바치거나 교우들의 이름을 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주 관장이 그의 아들을 데려와 목에 칼을 겨누었을 때도 그는 ‘이러한 일로 목이 잘리면 아들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감사 앞으로 끌려가서도 김 베드로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난의 은혜를 한 터럭만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드러냈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의 살과 뼈에 사무쳐 있으므로 사지를 자르거나 뼈를 부순다고 하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감사는 할 수 없이 김 베드로를 옥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김대권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 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이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