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이경언 바오로 (1792-1827)
‘종회’ 혹은 ‘경병’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경언(李景彦) 바오로는 179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교회 설립에 기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는 그의 형이고,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누나이다.
이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비록 몸은 허약하였지만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하였고, 정신적으로도 훌륭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신유박해 이듬해인 1802년에 형과 누나가 순교한 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바오로는 어머니와 형수와 함께 살면서 가난을 신앙으로 이겨냈다. 또 22세 되던 해에 한 중인 집안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아내의 성질이 고약하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모범적인 인내로 이를 극복하였다.
평소에 이 바오로는 속병이 있어 자주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불평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화평한 얼굴로 생활하였으며, 자주 성경를 읽거나 깊은 묵상에 빠지곤 하였다. 그는 언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의 곤경을 덜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1819년에 순교한 조숙 베드로가 이러한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 바오로는 이후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학식과 재주를 이용하여 교회 서적을 베끼거나 상본을 모사하였고, 이를 교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한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북경을 오가는 밀사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 주느라 힘썼으며,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북경을 오가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것도 바로 그였다.
이 바오로는 언제나 마음속에 순교이 뜻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자주 묵상하였고, 다른 교우들에게도 천주를 위해 죽음을 당할 준비를 하도록 권고하곤 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이 바오로는 자신이 나누어준 서적과 상본 때문에 전주 관아에 고발되었다. 이내 전주에서는 그를 체포하려고 한양으로 포졸들을 파견하였다. 얼마 안 되어 체포된 그는 우선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신앙을 고백한 다음,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주로 이송되었는데, 이후의 사실은 그 자신이 전주 옥중에서 기록한 수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바오로는 여러 차례의 혹독한 형벌 때문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채찍질해 가면서 순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에게는 오직 형과 누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전주 옥중에서 어머니와 가족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명도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서한 3통을 작성해 보냈는데, 여기에도 이러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상처의 괴로움으로 말하자면, 나의 너무나 연약한 육체만으로는 그것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천주의 은총과 성모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찌 한시인들 이를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 천주께서 지금까지 내게 무수한 은혜를 내려주신 것으로 볼 때, 분명히 나를 저버리려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큰 집에 올라오실 때에 내가 마중 나가 우리의 보편된 아버지께로 함께 가서 그분을 찬미할 것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느라 노력하였지만, 선천적으로 약했던 이경언 바오로의 육체는 더 이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상처는 계속 깊어졌으며, 그는 신음 속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27년 6월 27일(음력 윤 5월 4일) 전주 옥중에서 하느님에게 영혼을 바쳤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