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이경도 가롤로 (1780-1802)
어릴 때는 ‘오희’(五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경도(李景陶) 가롤로는, 1780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인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교회 설립에 기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1827년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 바오로는 그의 동생들이다.
이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본디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러웠던 그는, 장성하면서 학문에도 재능을 보여 교회 서적들을 연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그는 어릴 때 병을 앓아 곱사등이가 되었지만, 그 자신의 신앙과 성품으로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였다.
1793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이 가롤로는 미신 행위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지혜를 발휘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장례를 치렀다. 이후, 그는 되도록 비신자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면서 가족들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최필공 토마스, 홍재영 프로타시오 등 몇몇 교우들과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익히곤 하였다.
이 가롤로는 1797년에 어머니와 상의한 뒤, 누이인 이순이가 전주의 유중철 요한과 동정 부부로 언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비신자 친척들이 그를 비난하였으나, 그는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이 가롤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관장의 문초 때마다 “아는 신자들은 없으며, 교회 서적은 불태워버려 남아 있지 않다.”고 거짓으로 자백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한 다음, 처형되기 전날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제 일생 지은 죄가 하늘까지 닿았고, 제 마음은 목석과 같아 이와 같이 뛰어난 은혜를 받으면서도 아직 눈물도 흘릴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천주의 인자하심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만일 천주께서 당신의 너그러운 손으로 저를 이끌어 주신다면, 만 번 죽는다 해도 무엇이 원통하고 무엇이 불안하겠습니까?”
이러한 편지를 남긴 이경도 가롤로는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또는 새남터)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