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심능석 스테파노 (1819∼1868)
심능석(沈能錫) 스테파노는 강원도 횡성 태생으로, 1838년 경기도 광주에 사는 박성고(朴性皐)에게 천주 교리를 배웠으며, 샤스탕(J. Chastan, 鄭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맞이하여 세례를 받았다.
1845년 무렵에 스테파노는 용인 산의실(山義室, 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로 이주했다가 1862년 무렵에는 다시 강릉 계촌(季村, 일명 굴아위)으로 이주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페레올(J. Ferréol, 高 요한)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고, 칼래(N.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 도리(H. Dorie, 金 헨리코) 신부,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 등을 만나 고해성사를 받았다.
강릉 계촌에 살던 심능석 스테파노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박해가 잠잠해지자 계촌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이 계촌으로 피신해 오자, 스테파노는 그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 6월 24일(음력 5월 5일) 스테파노와 안토니오가 이웃과 함께 모임을 갖고 있을 때, 밀고자를 앞세운 경포, 곧 서울의 포교들이 계촌으로 들이닥쳐 먼저 안토니오를 체포하고, 그와 함께 있던 집주인 스테파노도 체포하였다.
스테파노는 이때 포교들 앞으로 나서서 “우리는 결박하지 않아도 도망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집에 가서 남에게 진 빚을 갚고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한 뒤에 재산을 적몰하십시오.”라고 요청하였다. 그런 다음 포교들의 허락을 얻어 모든 일을 처리한 뒤에 서울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는 동안, 스테파노는 “이리 저리 피신해 다녔으므로 아는 교우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한 명의 교우도 밀고하지 않았다. 또 배교하라는 명에는 “어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체포된 안토니오가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자 힘써 권면하여 순교 원의를 다잡도록 하였다.
이후 스테파노가 옥으로 끌려가 지내고 있을 때, 옥리가 그에게 다가와서 “너는 오늘 밤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하고 옷을 갈아입자.”라고 하자, 스테파노는 죽음을 초월한 태도를 보이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스테파노는 6월 30일(음력 5월 11일) 이후에 물고(物故)로, 곧 형이 집행되기 전에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4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