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한용호 베네딕토 (1821∼1868)
한용호(韓用浩) 베네딕토는 서울 남촌(南村)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유학(儒學)에 종사하였다. 본래 인자한 성품에 단아한 기품까지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가리켜 '옥(玉)과 같은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50년 무렵에 그는 서강(西江)의 창고 앞으로 이주하였다.
베네딕토가 천주교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시기는 1860년 무렵이었다. 이때 그는 천주 신앙이 참된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세속의 체면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은 채 교회 서적만 부지런히 읽고 필사하여 보관하였다. 또 교리를 강론하는 자리에 자주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교리에도 밝았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기도문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베네딕토는 서울의 양반은 물론 지방 사람들까지도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자, 마음이 움직여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때 마침 용인에 사는 친척 한성윤(韓聖允)이 입교를 권하자, 그는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에게 교리를 배운 다음 마르코 회장의 집에서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1865년 6월 2일(음력 5월 10일)이었다. 이어 그는 같은 해 10월에 고해성사와 견진성사도 받았다.
세례를 받은 뒤 베네딕토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으며, 교회 서적도 부지런히 보면서 묵상과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마치 회장과 같이 교우들에게 교리를 강론하여 일깨워 주었으며, 만일 온당치 않은 표양을 보이거나 말하는 교우가 있으면 즉시 이를 바로잡아주었다. 그러자 친척과 친구들 중에는 그를 모욕하면서 절교를 선언하는 사람도 있게 되었지만, 그의 신심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한용호 베네딕토는 한 동안 여러 곳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다가 1868년 윤4월(음력)에 체포되어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베네딕토는 죽는 것이 두려워 천주교와 베르뇌 주교를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진정하고,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면서 자신이 배운 여러 가지 기도문을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배교하고자 하나 살아나갈 희망이 없는 것은 매일반입니다. 그러니 배교하는 것보다는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후 베네딕토는 옥에 갇혀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교우들을 권면하면서 순교를 준비하였다. 또 자신의 이름을 호명할 때면, 마치 부모님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처럼, 아니면 큰 상을 받으러 나가는 것처럼 반가운 소리로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8년 6월 9일(윤4월 19일) 이후에 물고(物故)로, 곧 형이 집행되기 전에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