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이유일 안토니오 (1819∼1868)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는 충청도 연풍(延豊)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상경하여 소공동(小公洞)에 거주하였다. ‘유일’은 그의 자(字)이다.
안토니오는 29세(1848년) 무렵에 부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웠으며, 이진여(李辰汝)에게 대세(代洗)와 세례명을 받았다. 그리고 1858년 이전에 태평동(太平洞, 현 서울 중구 북창동⋅서소문동)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의 집에서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를 만나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칼래(N.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에게 여러 차례 고해성사를 받았다. 특히 다블뤼 주교는 안토니오를 부제(副祭)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하게 생각했으며, 그는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안토니오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그는 남종삼(南鍾三, 요한), 권복(權複, 프란치스코), 김정갑(金鼎甲, 바르나바), 민유배(閔裕培, 아우구스티노) 등에게 서적을 빌려주거나 천주교를 가르쳤으며, 대세(代洗)를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1865년 말부터 지도층 신자들은 방아책(防俄策), 곧 두만강 근처에 자주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의 세력을 방어할 책략을 마련하여 집권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건의하였다. 조선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나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신앙을 자유를 얻으려는 의도도 들어 있었는데, 이때 이유일 안토니오는 동료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김면호(金勉浩, 토마스), 남종삼 등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였다. 또 그는 흥선대원군이 주교들과의 면담을 요청하자, 다블뤼 주교를 모셔오기 위해 충청도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미루다가 1866년 초부터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그러자 겁이 난 안토니오는 강릉 계촌(季村, 일명 굴아위)으로 피신해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 6월 24일(음력 5월 5일)에 심능석(沈能錫, 스테파노)과 함께 경포(京捕), 곧 서울의 포교에게 체포되었고, 서울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6월 30일(음력 5월 11일) 이후에 물고(物故)로, 곧 형이 집행되기 전에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