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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남양112. 김 필립보 (1812∼1868)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 중방(현 충남 당진시 순성면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었으나, 부친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부친이 마음을 돌려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게 되었다.
장성한 뒤 박 마리아와 혼인한 필립보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하였고, 비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본래 성품이 순량하고 수계 생활에 열심이었던 그는 모방(P. Maubant, 羅 베드로) 신부의 복사로 봉사하기도 했다. 또 이후에는 수원 걸매(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로 이주하여 회장 소임을 맡았으며, 신부의 순방 때마다 직접 모든 준비를 하고 교우들이 타당하게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김 필립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신창 남방재(현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심해지자 홍주 신리(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에 살던 사위의 집으로 피신했는데, 얼마 안 되어 남양(南陽)에서 파견된 포교들이 그곳으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였다. 그때 필립보는 아내와 함께 아침 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포졸들이 온 것을 알고는 기도를 다 마친 뒤에 그들 앞으로 나갔다.
포교들은 필립보를 체포한 뒤에 천주교 신자인지를 묻고 나서 교회 서적이 있는 곳과 다른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지금이라고 어찌 천주교를 믿지 않겠는가?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며 사후에 심판하실 주님을 마땅히 힘을 다해 공경해야 한다. …… 책은 지난 박해 때에 모두 불태워 버렸고, 아는 신자 없이 나 혼자 얻어먹고 다니며 살았다.”
이후 필립보는 남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 박 마리아는 필립보와 포교가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고 하면서 자원하여 따라갔다. 그런 다음 남양 옥에 한 달 정도 갇혀 있다가 1868년 9월 18일(음력 8월 3일)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들 부부는 동갑내기로 5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