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 (1838∼1868)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대구 감영에서 아전을 지낸 부친에게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에 부친을 여의고 모친 수산나, 여동생 프란치스카, 데레사와 함께 살았다. 그는 어렸을 때 병을 앓아 본래의 얼굴 모양을 잃었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동생들을 잘 보살폈다.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천주 신앙에 대해 듣게 된 것은 16세가 되던 해였다. 이에 그는 가족들과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로는 미신을 모두 끊어버리고 동정으로 살아갈 결심을 하였다. 그의 모친 수산나가 혼배를 권유할 때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물리치곤 하였다.
해가 갈수록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동정을 지켰음은 물론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데도 열심이었다. 하루는 병이 든 여동생을 찾아가 대세를 주었는데, 그 여동생은 알로이시오 곤자가를 보면서 “오라버니가 쓴 갓과 끈이 아름다운 꽃과 구슬입니다.”라고 하면서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재산 일부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준 뒤, 남은 재산을 가지고 칠곡 한티 교우촌(현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으로 이주해 교우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교회 서적도 정성으로 필사하고,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교리를 문답했으며, 묵상과 기도 생활에도 열중하였다. 또 이불을 마귀 장막으로 여겨 잘 때에도 이불을 덮지 않았으며, 성호경을 드릴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애통한 마음을 드러냈다고 한다.
평소에도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고신극기에 열심이었다. 사순 시기가 되면 모친이 걱정할 정도로 재(齋)를 열심히 지켰고, 삼구(三仇)의 하나인 육신을 미워하여 자신의 몸을 편태하곤 하였다. 모친이 걱정스러운 말을 하면, 도리어 “죄가 많고 흉한 육신이니, 이를 보속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쓰겠습니까?” 하고 좋은 말로 모친을 달래곤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피신하기 시작하였다.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도 이때 한티를 떠나 대구로 이주해 살았는데, 어느 날 경포(京浦), 곧 서울의 포교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대구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모친과 여동생이 피할 것을 권유하자, 그는 “이렇게 좋은 때를 놓친다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간곡한 모친의 권유를 저버릴 수 없었으므로 마지못해 하양(河陽)으로 피신하였다.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체포된 것은 하양 성 밖 십 리쯤에 있는 한 비신자의 집에서였다. 곧장 대구 관아로 압송되어 목에 칼을 쓴 채 옥에 갇힌 그는 한 포교에게 “내가 누구에게 받을 돈이 있으니, 이를 받아서 내 빚을 갚아 노모가 걱정하지 않도록 해주시오.”라고 부탁하였다. 그런 다음 옥중에서 교우들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와 여러 가지 기도를 바쳤다.
이후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서울로 이송되었다. 도중에 그는 소리 내서 교리를 외웠으며, 기쁜 얼굴로 포교들에게 교리를 설명하곤 하였다. 또 아는 사람을 만나자 “모친을 만나면 위로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윽고 서울 포도청에 도착한 그는 옥에 있는 교우를 보고는 “어찌하여 지금까지 살아 있느냐?”고 말하였다. 또 옥졸들에게는 “천주 교리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믿어야 할 교리이니, 당신들도 이를 믿으시오.”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므로 포교와 옥졸들까지도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천주학쟁이 가운데 제일이다.”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런 다음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무진년(1868년)으로, 그의 나이 3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