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박선진 마르코 (1836~1868)
박선진 마르코의 본은 밀양이며, ‘선진’은 그의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이다. 그의 고향은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로, 그의 선대에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염전을 일구면서 살았다.
원머리 일대에는 일찍부터 천주 신앙이 전파되었으나, 마르코의 집안에서는 뒤늦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열심한 신자였던 모친과 달리 부친은 천주교를 반대하였고, 따라서 신부가 올 때마다 성사를 받으려 하면 부친이 금한 탓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촌인 박태진 마티아와 함께 교우들과 연락하면서 꿋꿋이 신앙을 지켰다.
1866년과 1867년에 원머리 교우들 몇몇이 체포되어 순교했으나, 마르코와 마티아는 체포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 가을에 원머리로 들이닥친 수원 포교들에게 함께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마르코는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이제 가면 죽을 것이니 어찌 혈육의 정에 박절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명에 따라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영혼을 구하는 데 좋은 일이니, 과히 염려 마시고 몸조심하십시오.”
박선진 마르코는 사촌 마티아와 함께 수원 관아에 이르러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사촌 마티아가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자, 마르코는 그에게 “이제는 배교하여도 죽을 것이다. 그러니 큰 임금을 배반하고 죽어서 지옥의 영원한 벌을 받아 어찌 하겠느냐?”고 힘써 권면하였다. 이에 마티아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박해자들 앞에서 꿋꿋이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옥에 갇힌 지 15일 만에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으니, 당시 마르코의 나이 32세였다.
마르코와 마티아가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같은 마을에 살던 서덕행에 의해 거두어져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 233번지)에 나란히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