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피 가타리나 (1818~1878)
피(皮) 가타리나는 1866년에 순교한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의 두 번째 부인으로, 혼인한 뒤에는 서울 창동(倉洞, 현 서울 중구 남창동)에 살다가 남대문 밖 자암(紫岩, 현 서울 중구 봉래동⋅순화동⋅의주로)으로 이주해 살았다. 본래 총명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천주 교리와 기도문을 배웠지만, 비신자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올바로 교리를 실천할 수 없었다.
가타리나가 오랫동안 홀아비로 살아오던 정 마르코와 혼인한 것은 1837년 무렵이었다. 이후 남편 마르코가 1840년 무렵에 자발적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자, 가타리나도 그의 영향을 받아 신자로서의 본분을 되찾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 마르코와 정덕(貞德)을 지키기로 굳게 언약하였고, 열심히 묵상 기도 생활을 하면서 대⋅소재도 열심히 지켰다. 그녀는 많은 기도문을 외운 데다가 폭넓게 교리서를 익힌 덕택에 아주 교리에 밝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권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타리나는 집안이 가난한 탓에 바느질품을 팔아 생활을 했지만, 남을 위한 애긍시사에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자신은 좋지 않은 옷과 음식을 입고 먹었지만 헐벗은 교우들을 만나면 남몰래 자기 옷을 벗어주었고, 교우나 비신자를 막론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 주었으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아주곤 하였다. 남편 마르코가 회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집에는 항상 많은 교우들이 왕래했는데, 이들을 대접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웃는 얼굴로 겸손하고 온순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가타리나는 선교사들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1859년 말에는 박해가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를 보호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창동 집을 남에게 맡기고 남편과 함께 주교 댁으로 가서 살았으며, 남대문 밖 자암에 작은 집을 사서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주교를 모셨다. 그뿐만 아니라 가타리나는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와 브르트니에르(J. Bretenières, 白 유스토) 신부도 얼마 동안 자신의 집에 모셨다. 이처럼 밖으로는 남편인 마르코 회장을 도와 교회에 봉사하고, 안으로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를 하면서 편히 쉴 틈이 없었음에도 가타리나는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1866년의 병인박해로 선교사들과 남편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가타리나는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숨어 지냈다. 그러면서도 순교하지 못한 것을 늘 원통하게 생각하였고, 스스로 더욱 엄격하게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녀는 비신자의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도 대재를 지키고 묵상과 기도를 거르지 않았으며, 스스로 첨례표를 만들어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부가 없어 성사를 받지 못하는 것을 늘 서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1877년 9월 24일(음력 8월 18일)에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주교가 조선에 다시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했을 때, 가타리나는 비로소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이듬해 1월 28일(음력 1877년 12월 26일) 여러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가타리나도 이 무렵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내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가타리나는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선교사들의 거처를 진술하지 않은 탓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는 참된 천주교를 봉행하는 사람인데,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예수, 마리아”만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 결과 가타리나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서도 옥에 있는 교우들을 권면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가 1878년 3월 17일(음력 2월 14일) 장티푸스까지 걸려 옥사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6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