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31 최지혁 요한

131. 최지혁 요한 (1808~1878)

 

최지혁(崔智爀) 요한은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조부 때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요한도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익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선일’(善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으며, 아내 이아기[李阿只] 루치아 또한 1878년에 순교하였다.

1846~1847년경에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신부를 만나 세례성사를 받은 요한은 이후 충청도 홍주에서 살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장치선(張致善), 김계쇠(金季釗, 베드로)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마련했으며, 1866년 7월 1일(음력 5월 19일)에는 리델 신부와 함께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였다.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 상해에 머물던 요한은 같은 해의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함대의 물길 안내인으로 동행했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가 2년 가까이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1868년 7월경(양력)에는 조선에 재입국할 방도를 모색하던 리델 신부의 제안에 따라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요한이 귀국하기 직전에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그의 아내 박 막달레나와 세 딸 부부가 모두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은 귀국한 뒤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후 요한은 이아기 루치아를 새 아내로 맞이하였다.

1870년 3월 2일(음력 2월 1일) 요한은 충청도를 출발하여 9월 30일(음력 8월 4일) 중국 차구[차쿠](岔溝, 현 요녕성 대련시 장하시 蓉花山鎭)에 도착하였고, 이어 상해로 가서 리델 주교를 도왔다. 그러다가 1872년 5월에 귀국한 뒤 중국을 왕래하며 조선 교회의 소식을 전했고, 1875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새로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에 그는 서대문 밖 고마청동(雇馬廳洞, 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집을 마련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876년 5월 8일(음력 4월 15일) 블랑(J. Blanc, 白圭三 요한) 신부와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빅토르) 신부를 모시고 조선으로 귀국했으며, 1877년 9월 23∼24일(음력 8월 17∼18일)에는 리델 주교, 로베르(P. Robert, 金保祿 바오로) 신부, 두세(C. Doucet, 丁加彌 가밀로) 신부 등을 황해도에서 맞이한 뒤 리델 주교와 함께 서울 고마청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리델 주교의 입국 사실은 곧 탄로가 났다. 중국으로 보낸 교회 밀사가 국경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체포령도 내려졌고, 최지혁 요한은 리델 주교, 아내 루치아와 함께 1878년 1월 28일(음력 1877년 12월 26일)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어 리델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요한은 “지금 배교한다고 해서 어찌 마음에 기쁘겠습니까? 오직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후 요한은 오랫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였다. 연로하고 병이 든 그에게 이러한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는 옥중에서도 기도와 묵상을 멈추지 않았으며, 틈틈이 옥졸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리델 주교가 중국으로 추방된 지 한 달 뒤인 1878년 7월 14일(음력 6월 15일)에 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70세였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