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33 이병교 레오

133. 이병교 레오 (1813~1879)

 

이병교(李秉敎) 레오는 서울 차동(車洞, 일명 수렛골, 현 서울 중구 순화동⋅의주로)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덕경’(德敬)이었다. 어렸을 때 부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웠으며, 1836년 초에 입국한 모방(P. Maubant, 羅 베드로) 신부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또 1845년에 입국한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복사로 활동했으며, 최지혁(崔智爀, 요한) 등 여러 교우들과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6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가 입국하자, 레오는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의 집에서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에는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신부의 복사도 하였고, 조선에 입국하는 여러 선교사들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보살폈다.

그러던 중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병교 레오는 박해를 피해 여러 해 동안 숨어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가산을 모두 잃어 어렵게 지내면서도 신앙생활만은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1868년부터 레오는 최지혁 요한 등과 함께 선교사 영입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876년 5월 8일(음력 4월 15일)에 블랑(J. Blanc, 白圭三 요한) 신부와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빅토르) 신부가, 1877년 9월 24일(음력 8월 18일)에 리델 주교가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레오는 1877년에 상경하여 드게트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이후 리델 주교와도 상봉하였다. 당시 그는 충주 서촌의 방축리(坊築里, 현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진잠(鎭岑, 현 대전시 유성구 원내동)으로 이주하였다.

1877년 8월(음력) 최지혁 요한이 진잠에 살던 이병교 레오에게 연락하여 드게트 신부가 거처할 집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자, 레오는 용인 공수동(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독성리)에 집을 마련하고 교우들과 함께 드게트 신부를 모셨다. 이로부터 얼마 뒤 드게트 신부는 레오의 아들 이경빈(李景彬, 요한)을 복사로 삼아 교우촌 순방을 떠났고, 1878년 초에는 리델 주교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후 레오는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공주의 서림촌(西林村)에 집을 사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드게트 신부가 이곳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였고, 1879년 5월 16일(음력 윤3월 26일)에는 밀고자를 앞세운 경포(京捕), 곧 서울 포교와 공주 포교가 그곳으로 들이닥쳐 신자들을 체포한 뒤, 드게트 신부와 레오, 김덕빈(金德彬, 바오로), 이용헌(李容憲, 이시도르) 등을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체포된 직후 레오는 집안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보도록 했고, 서울로 압송될 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강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 함께 가던 아들 요한이 만류하자, 레오는 “내가 다른 때에는 생명이 아까워서 못했지만, 지금은 무서울 것이 없다. 주님의 명으로 이렇게 체포되어 서울로 가니 즐겁다.”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아들에게는 도망을 권유하였다.

이내 서울 우포도청에 도착한 이병교 레오는 문초와 형벌 중에도 교우를 밀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만 번을 죽는다 해도 오랫동안 봉행해 온 천주교를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갇혀 2개월 여 동안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으며, 거기에 병까지 얻어 고초를 겪다가 1879년 8월 8일(음력 6월 21일)에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66세였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