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지(黃石之)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 당산리(堂山里)의 양반 출신으로, 경기도 수원 샘골에서 살았으며, ‘사윤’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본래 성격이 점잖고 엄격하였던 그는 모든 친척과 이웃의 존경을 받았으며, 39세 때 이웃에 살던 김취득(金就得, 1816년의 순교자)의 권유로 천주 교리를 배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였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베드로는 좋아하던 술을 끊고, 자신의 결점을 고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21년에 아내와 네 아이들을 차례로 잃었으나, 그는 조금도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처자가 선종(善終)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천주께서 불러 가신 데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기도를 하고, 덕을 닦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 의지할 데가 없게 된 베드로는 종종 서울 아현에 사는 조카 황 안드레아의 집에 가서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이웃에 사는 김작은아기(金小阿只)를 입교시키는 등 선교 활동을 하였다. 한편 그의 조카 안드레아는 오래 전부터 교회를 위해 북경을 왕래하거나 교우들을 돕는 일을 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33년 10월경에 황 안드레아의 행적을 추적해 오던 좌포도청의 포교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아현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마침 집에 없었고, 그 대신 황석지 베드로가 체포되었다.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베드로는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또 포도대장이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의하자, “천주교를 오랫동안 믿어왔으므로 갑자기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고 나서 함께 투옥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들에게 ‘압수당한 책자와 성물은 모두 베드로의 것’이라고 자백하도록 시켰다.
황석지 베드로는 이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도 “천주 신앙을 독실하게 믿어왔으므로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거듭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때 옥중에 있는 한 비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베드로의 행동에 놀라 그 이유를 묻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섬기는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大君]이시며,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배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만 번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옥에 있던 죄수들은 베드로에게 천주 교리에 대해 듣기를 원하였고, 베드로는 이때부터 그들에게 교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던 1833년 11월(음력) 이후의 어느 날, 베드로는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5세 또는 66세였다. 그의 선종 소식을 듣고 친척들이 옥으로 찾아갔을 때, 옥에 있던 한 비신자는 자신이 본 사실을 이렇게 말해 주었다.
“베드로가 세상을 떠날 때 옥 전체에 환한 빛이 비쳤습니다. 무슨 일인가 보러 갔더니, 그의 감방에 찬란한 광채가 비치고 있었고, 비둘기 한 마리가 방안을 돌고 있었습니다. 그 후 몇 분이 안 되어 그가 숨을 거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