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예산 고을의 양가 집안에서 태어난 에메렌시아는 혼인할 때까지 천주 교리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스무살 무렵 친정 오빠인 이순빈 베드로를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이후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에메렌시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녀는 모든 미신 행위를 끊었으며, 교회의 대·소재(大小齋)를 충실히 지켰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은 몹시 분노하여 에메렌시아를 학대하였다. 그는 가끔 손발을 쓰지 못할 정도로 에메렌시아를 때렸고, 추운 겨울에 집에서 내쫓거나 옷을 벗겨 눈 속에 여러 시간 매달아 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대가 5~6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에메렌시아는 침착함과 인내로 모든 것을 참아냈다.
본래 성격이 유순하고 겸손했던 에메렌시아는 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녀를 못살게 굴었던 남편도 시간이 지나면서 에메렌시아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녀의 끈질긴 노력 덕택으로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이후 그들 부부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산속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녀는 남편을 잃고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수리산(修理山, 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에 있던 오빠의 집으로 이사해 생활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6월에 서울에서 파견된 포교들이 수리산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에메렌시아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에 앞서 수리산 교우들은 박해의 위험이 닥쳐오자 그녀에게 피신할 것을 권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에메렌시아는 이를 거절하면서 ‘구세주의 지시만을 기다린다’고 대답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에메렌시아는 가혹한 형벌을 여러 차례 받아야만 하였다. 박해자들은 그녀에게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고, 그녀는 이를 거부하여 첫 번째 문초 때에 50대, 두 번째 문초 때에 70대의 곤장을 맞았다. 함께 수감되어 있던 교우들이 이를 매우 측은하게 생각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순교 원의를 다졌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도우심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크나큰 고통이 큰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세 번째 문초 때에도 에메렌시아는 다시 한 번 신앙을 굳게 지키고 50대의 곤장을 맞았다. 이로 인해 그녀의 살은 썩어 들어가 구더기가 번식할 정도가 되었고,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은 그녀의 기력을 더욱 쇠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그녀는 마지막으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지 사흘 만에 그 후유증으로 옥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그 후 1930년 5월 26일 서울교구에서는 수리산에 있던 성인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의 무덤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하였다. 이때 프란치스코의 무덤 옆에 있던 이 에메렌시아의 무덤도 발굴한 뒤, 그 유해를 중곡동에 있는 교회 묘지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40년 뒤인 1970년 5월 19일에는 에메렌시아의 유해를 중곡동 묘지에서 발굴하여 5월 28일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