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35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1.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1798∼1841)

 

김덕심(金德深) 아우구스티노의 본관은 경주,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만집’(萬集)으로, 1841년에 서울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의 아우이다. ‘덕심’은 아우구스티노의 자이며, 집안에서는 ‘치영’(致英)이라고도 불렀다.

1798년 경기도 광주의 구산(현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서 김영춘(金永春) 바오로와 청주 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830년 무렵에 천주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때 그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처음에는 입교를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형제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고, 그 결과 얼마 안 되어 구산 마을은 교우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초기에 구산의 김씨 형제들은 박해자들에게 고발되어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서울 포교들이 다시 구산으로 들이닥쳤고, 이때 아우구스티노는 아우인 김윤심(金允深) 베드로 알칸타라와 사촌 한 명과 함께 체포되어 광주 남한산성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잠시 피신할 수 있었던 아우구스티노의 형 안토니오도 그 뒤에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남한산성으로 압송된 김덕심 아우구스티노는 동생과 사촌과 함께 판관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천주교를 배반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는 판관 앞에서 그는 의연하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였고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동생과 사촌과 함께 용감하게 이를 참아 받았다. 그런 다음 남한산성 옥에 투옥되어 오랫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듬해 박해가 끝나자 아우구스티노의 자식들은 아버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지만, 아버지를 석방시킬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옥고에 시달리고 낙망의 유혹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순교를 할 수도 없고 자유를 되찾을 수도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러다가 1841년 초에 병이 들었고, 이로 인해 고통을 겪다가 1841년 2월 19일(음력 1월 28일)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가지고’ 옥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 42세였다. 순교 뒤 그의 시신은 아들이 거두어 고향인 구산에 안장하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