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수(崔榮受) 필립보의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는 ‘희원’(希遠),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병상’(秉常)으로, 서울 전동(典洞)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흥해(興海)로 유배된 최해두(崔海斗)가 그의 부친이며, 모친 해남 윤씨는 1801년에 전라도 해남(海南)으로 유배된 윤현(尹鉉)의 딸로 1795년의 순교 복자 윤유일(尹有一, 바오로)과는 사촌 사이가 된다. 또 1801년에 순교한 복자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는 필립보의 종조부(從祖父)이다.
필립보의 집안은 일찍부터 조부와 부친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도 어릴 때에 이미 천주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9세 때는 부친에게서 십계명을 배웠다. 그러나 부친이 1801년에 유배된 데다가 얼마 뒤에는 모친마저 사망한 탓에 어려서부터 어렵게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친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 때, 필립보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곳까지 찾아가 부친의 시신을 안장했다고 한다.
모친이 사망한 뒤 필립보는 동생 최병문(崔秉文, 야고보)을 데리고 삼촌 댁으로 가서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차서 혼인을 했지만 곧 부인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부친에게 배운 교리를 묵상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1810년 무렵 동생 야고보가 교우 이연이(李連伊)와 혼인하자 필립보는 동생 부부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남대문 밖 이문동(里門洞, 현 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와 용산구 후암동에 걸쳐 있던 마을)에서 살았다. 그러나 생계 때문에 오랫동안 신앙생활에 전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1838년 2월(음력)부터 서소문 안에 살던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과 교류하면서 다시 기도와 묵상 생활을 하게 되었고,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Imbert, 范 라우렌시오) 주교에게서 세례와 견진 성사까지 받았다.
이때부터 필립보는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양조 기술을 배워 자신의 집에서 미사주를 제조하였고,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등 지도층 신자들과도 교류하였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박애심으로 근심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냉담자들을 회두시켰으며, 무식한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신자들의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제공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된 4월 12일(음력 2월 29일)에는 동생 야고보 부부가 체포되었다. 이때 외출했다가 돌아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필립보는 주동(鑄洞, 현 서울 중구 주자동)에 사는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의 집으로 피신하여 두 달 동안 머물렀다.
그 사이에도 필립보는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곤 하였다. 또 앵베르 주교의 명에 따라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이문우(李文祐, 요한) 등과 함께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 동생 야고보가 순교하자 필립보는 혼자된 제수와 함께 종현(鐘峴, 현 서울 중구 명동)에서 살다가 서부 후동(後洞)에 있던 한소임(韓小任)의 집으로 이주하였다.
한편 포도청에서는 계속해서 최영수 필립보의 종적을 추적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와 친분이 있던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던 중 포도청에서는 1841년 4월(음력) 초에 필립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는 포교들을 한소임의 집으로 파견하였고, 이곳에서 필립보를 체포하였다. 이때 그가 지니고 있던 교회 서적과 묵주도 압수되었다.
우포도청으로 압송된 필립보는 이내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신자들을 고발하지 않았고, 형벌 가운데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오랫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겪은 끝에 1841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마지막으로 100대의 매를 맞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가 우포도청의 문초 때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비록 심히 우매하기는 하지만, 어찌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천주교는 집안 대대로 믿어오는 종교이니, 어찌 천주를 배반하고 부모의 가르침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매질 아래 죽을지라도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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