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2 김면호 토마스
  1. 김면호 토마스 (1820∼1866)

 

김면호(金勉浩) 토마스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字)는 계호’(季浩)이다. 경기도 영평(永平, 현 포천시)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5남 1녀 중 5남으로 태어났으며, 부친이 사망한 뒤인 1834년경에 어머니 이 씨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두 형인 김익례(金翼禮)와 김응례(金應禮)는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토마스는 14세 때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맏형에게 세례명을 받았다.

토마스의 형제들은 천주교에 입교한 뒤 신앙생활을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주동(鑄洞, 현 서울 중구 주자동)으로 이주한 뒤 기해박해를 당했다. 이때 체포되는 것을 면한 토마스는 약과 붓 등을 팔며 이리저리 떠돌게 되었고, 1849년부터는 신앙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에 남은 두 형과 교우들이 책망도 하고 권면도 했지만, 그는 처자에게는 항상 성사를 받도록 하면서도 자신은 교회를 멀리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한때 다블뤼(A. Daveluy, 安 안토니오) 신부의 복사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1857~1858년경부터 인천에 살면서 서울을 왕래하던 토마스는 1865년경에 서울 상동(尙洞)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시 냉담을 풀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신자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당시 토마스를 잘 알고 있던 장 필립보는 그에 대해 “토마스는 냉담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또 모든 흠을 깨끗하게 만드는 순교를 갈망했다.”고 증언하였다.

1865년부터 교우들이 방아책(防俄策), 곧 두만강 근처에 자주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의 세력을 방어할 책략을 마련하여 집권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건의할 계획을 세우자, 토마스도 여기에 동참하였다. 이 방아책은 조선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나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자는 것으로, 여기에는 신앙을 자유를 얻으려는 의도도 들어 있었다. 이때 김면호 토마스는 흥선대원군의 사돈인 조기진(趙基晋)을 통해 대원군에게 서한을 제출했는데, 대원군에게서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하자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대원군이 주교와의 만남을 원한다는 전갈을 받은 토마스는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를 모셔오기 위해 1865년 12월 초(음력)에 평양으로 떠났다. 그러나 주교를 만나지 못하였고, 주교와 대원군의 만남도 성사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원군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모든 약속을 어기고 박해를 일으켜 프랑스 선교사와 신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김면호 토마스는 병인박해 초기에 체포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중형이 그에게 피신을 권고하자, 그는 “나 때문에 여러 교우들이 해를 받았는데, 나 혼자 피해서 살기를 바랄 수는 없다. 주님의 안배하심만을 믿고 이전의 잘못을 보속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결국 서울에 남아있던 토마스는 1866년 7월(음력)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포도청의 문초와 형벌 중에 굳게 신앙을 증거하면서 끝까지 신자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1866년 9월 8일(음력 7월 30일) 새남터로 끌려 나가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46세였다. 포도청에서 마지막 문초 때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이전의 죄를 뉘우쳤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인데, 지난 18년 동안 천주교를 끊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것이 매우 후회스럽습니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