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5 김조이 수산나

65. 김조이 수산나 (1818∼1867)

 

김조이 수산나는 충청도 공주에 살던 김 안드레아의 딸로,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 교리를 배웠다.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녀는 교리에 밝은 데다가 신자로서의 본분도 잘 지켰으며, 세속 일도 잘 알았다.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주변 상황 때문에 나이가 들어 박 야고보와 혼인하였다.

중년에 이르러 남편이 죽자 수산나는 시어머니와 자식 남매를 데리고 시사촌(媤四寸)인 박 요한에게 의탁해 살았다. 그녀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기도와 묵상생활에 충실하였고, 고신극기로 영혼을 닦는 데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죽을 위험에 처한 이들에게 대세를 주고, 애긍도 베풀었다. 평소에도 그녀는 순교자들을 칭송하면서 자신도 때를 만나 순교의 은혜를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김조이 수산나는 문경 호항리(狐項里, 현 경북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의 여우목)에 살고 있었다. 박해 초기에 포교들이 들이닥치자, 교우들과 함께 두 차례나 산속의 굴로 피신했던 수산나는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그녀는 “천주께서 나를 버리지 않고 불러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다 갚겠는가?”라고 하면서 병으로 고생하는 아들 박효훈 프란치스코와 딸 박 아가타의 손을 잡고는 “천당에서 만나자.”고 다짐하였다.

이내 문경 관아로 압송되었다가 상주 진영으로 이송된 수산나는 영장 앞에서 천주교 신자임을 정확하게 밝힌 뒤, 십계명과 기도문들을 암송하였다. 그런 다음 주장(柱杖)과 태장(笞杖)을 맞아 받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굳게 신앙을 증거하고 투옥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두 달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다시 주뢰형을 받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이후 영장이 사형을 결정한 뒤, 수산나는 옥중에서 집으로 편지를 보내 자식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아들 효훈아, 나는 너에게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주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니 모시고 있는 삼촌의 명을 주님의 명으로 받아들이도록 해라. 딸 아가타야, 너는 헛된 혈육의 정으로 잠깐인 세월을 허송하지 말고 영원한 천당을 시댁으로 생각하여라. 너희 두 사람이 구령(救靈)에 힘쓰기를 바라며, 서로 화목한 사랑으로 지내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거든 내 뒤를 따라오너라.”

 

당시 상주 진영에서는 1867년 1월 17일(음력 1866년 12월 12월)부터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수산나도 1867년 1월 20일(음력 1866년 12월 15일)에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49세였다. 수산나가 순교한 뒤 아들 효훈은 모친의 시신을 찾아 안장하였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