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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보은, 충주72. 민윤명 프란치스코 (1822~1866)
자(字)가 ‘윤명’인 민윤명 프란치스코는 1822년 충주 광벌(廣伐, 현 충북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열일곱 되던 해 진천(鎭川) 비들목(현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광혜원리)에 살던 임여문의 부친인 임 회장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한 그는 언제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마음이 양순한 데다가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광벌을 떠나 충주 맹골의 하개안 계마대(繫馬臺, 현 충북 음성군 맹동면 봉현리)로 이주하였고, 이내 그곳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프란치스코 회장이 처음 박해를 당한 것은 1860년의 경신박해가 끝난 다음해인 1861년이었다. 당시 충주 지역에서는 개인적인 욕심을 차리려는 경기도의 죽산 포교와 서울 포교들이 포졸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곤 하였다.
어느 날 서울 포교들은 프란치스코 회장의 친척 한 명을 잡아 무기 장터(현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로 끌고 간 뒤 “천주교 신자를 대라.”고 하면서 매질하였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프란치스코 회장의 이름이 나왔고, 포교들은 이내 계마대로 달려가 프란치스코 회장을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포승으로 묶으려 하였다. 그러자 프란치스코 회장은 태연하게 “나는 결박하지 않아도 도망할 사람이 아니니 그대로 가자.”고 말하였다.
본래 포교들은 프란치스코 회장을 관아로 압송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의도는 프란치스코 회장에게서 ‘돈이나 갈취해 보자’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광연 장터(현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광혜원리)에 이른 뒤, 프란치스코 회장에게서 돈을 빼앗고는 풀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 회장은 이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22일(음력 10월 16일)에 서울 포교와 포졸들이 계마대로 들이닥쳐 프란치스코 회장을 체포하였다. 이전에 프란치스코 회장을 체포했다가 놓아준 적이 있는 그 포교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인근의 충주 방축골(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 또는 맹동면 봉현리)로 가서 그곳 회장인 김백심(암브로시오)・김성서(파비아노) 부자와 송군명(바오로) 등을 체포하여 충주로 압송하였다. 압송되기 전에 프란치스코 회장은 아우인 민 야고보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고 한다.
“내가 죽은 후에라도 집안과 친척, 마을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라. 그리고 타당하게 교회의 규구(規矩)를 지키다가 내가 순교한 표양을 따라 영복소(永福所, 곧 천당)에서 만나자.”
프란치스코 회장은 이후 50일 동안 충주 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때마다 프란치스코 회장은 관장이 묻는 말에 정연하게 대답하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그런 다음 옥에 있던 동료 교우들과 함께 순교했으니, 그때가 1866년 말(음력)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순교 후 프란치스코 회장의 시신은 아우인 야고보가 거두어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