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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남양73. 김사범 ( ? ~ 1866)
김사범은 충청도 청주의 양반 출신으로 온양 방아사골(현 충남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에서 살았다. 그는 6형제 가운데 맏이로 성품이 굳세고 의연하였으며, 어려서 천주교에 입교하여 교리에 밝은 데다가 이를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는 데 힘썼다. 또 남과 사귈 때는 말에 조리가 있고 도리에 맞게 행동하였으므로 비신자들도 그를 비방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세례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김사범은 형제들과 함께 부모를 모시고 산중에 살면서 농업과 상업에 힘써 제법 살 만했는데,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취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던 중 부친이 병이 들어 여러 해 동안 앓게 되자 그는 정성껏 약을 마련하여 드렸고, 거의 밤마다 부친을 수발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마을의 비신자들조차 그를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이후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모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으며, 동생이 진 빚을 갚아주면서도 원망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가 방아사골로 오자 김사범은 그곳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3년 동안 주교의 복사가 되어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였다. 이후 다블뤼 주교는 1865년에 방아사골을 떠나 홍주 신리(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로 거처를 옮겼다.
다블뤼 주교가 신리로 이주한 다음해인 1866년에 병인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김사범은 여러 동생들을 위하여 관속에게 돈을 주어 체포를 면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해 6월에는 중국으로 피신하기 위해 배를 기다리던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기도 하였다.
1866년 가을, 김사범은 온양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가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배교를 뉘우치고 순교를 결심했으며, 얼마 안 되어 수원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원유수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다블뤼 주교를 모시고 있던 사실을 거짓 없이 자백하였고, 막내 제수와 교우들이 옥으로 끌려오자 그들에게 순교를 권면하고 신앙을 북돋워 주었다. 이때 막내 제수가 순교를 원하지 않자 김사범은 오 요한이란 배교자를 설득하여 그 제수를 친가로 돌려보내 주도록 주선하였다.
이후에도 김사범은 함께 수원유수부 옥에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면서 순교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태장 수백 대를 맞고 ‘예수, 마리아’를 크게 부르며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6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