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82 서태순 베드로

82. 서태순 베드로 (1823~1867)

 

서태순(徐泰淳) 베드로는 태중 교우로, 충청도 청풍에서 서치보(徐致輔)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달성(達成)이고, 1868년에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한 서서방은 그의 형이다.

베드로의 가족들은 일찍부터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면서 생활해야만 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장성한 뒤 베드로는 김 데레사와 혼인하여 충주 장호원(현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서 살다가 경상도 대구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1859∼1860년의 경신박해로 체포되어 대구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베드로는 관장 앞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교회 서적을 바치지도 않았고,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벌이 계속되면서 팔다리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고, 여섯 달 동안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하게 되자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이후 베드로는 여러 해 동안 냉담 상태로 지내면서 교회를 멀리하였다. 그러다가 이전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회두하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다시 한 번 체포된다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겠다’는 원의를 다지곤 하였다.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베드로는 가족을 데리고 대구를 떠나 문경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 가지 않았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다니던 문경 포교들이 한실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1867년 1월 18일(음력 1866년 12월 13일) 포교들에게 체포된 서태순 베드로는 문경 관아로 압송되었다가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아내 김 데레사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으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나는 천주교 신자이므로 결코 신앙을 버릴 수 없소.”라고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함께 투옥되어 있던 김 아우구스티노, 서유형 바오로, 박 루치아 등과 함께 다시 한 차례 매를 맞고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67년 1월 23∼24일(음력 1866년 12월 18∼19일)로,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 굵은색 표시: 약전 출간 이후 수정된 내용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